<기독공보 기획> 전주예수병원 장례식장 대표 홍성언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5년 12월 31일(목) 08:15

나이 30대 후반까지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 일순간에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이가 있다. 그가 말하는 예수님을 모르기 전의 삶은 '탕자'(蕩子)였다.

전주예수병원 장례식장과 주차장을 운영하는 홍성언 장로(전주노회 산돌교회)의 삶은 마태복음 20장에 나온 포도원 품꾼의 은혜를 떠올리게 한다. 뒤늦게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노라" 고백하면서부터 누구보다 '먼저된 자'로 거듭났다.

"집 나간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탕자의 비유'처럼 주님의 은혜가 제 삶에 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인도하시니 기쁨이 충만합니다."

▲ 전주 산돌교회에서 함께 자리한 홍성언 장로 가족.

홍성언 장로는 1986년 나이 30대 후반까지 세상유혹에 휩쓸려 살았다. 놀기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에다 친구들이 많아 거의 매일 술자리를 가졌다. 태권도 유단자로 완력까지 겸비해 한때 체육관을 운영했던 그는 유난히 자존심이 강해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면 져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삶의 중심을 예수님께로 향하고부터 삶이 180도 바뀌었다. 헛된 유혹을 가려낼 줄 알아 여기서 얻은 신앙의 승리를 주변에 전하고, 자존심을 꺾어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상대방을 높여주는 배려의 사람으로 변모했다.

"전주에서 서울 올라갈 일 있을 때 고속버스를 애용하는데, 간혹 옆에 앉은 모르는 사람이 '인상이 좋으신데 혹시 목사님이시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기분히 굉장히 좋습니다. 예수님 만나 인생 살 맛나고 성격과 인상까지 변화되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가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누군가에게 전도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그는 제발로 교회를 찾았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큰아들을 보며 아빠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이 서며 종교를 갖기로 했다. 혼자 여러 종교시설을 둘러보다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곳이 교회였다.

믿기 시작한 그는 우직했다. 모시고 살던 어머니를 비롯해 부인 박은자 권사와 4자녀 모두를 교회로 인도했다.

홍 장로는 어머니에게 "아버지 제사를 드리지 않고 추도예배를 드리겠다"면서, 유교이념과 제사문화를 버릴 것을 설득했다. 홍 장로의 결단으로 어머니는 기독교신앙을 접하고 천국소망까지 가졌다.

홍 장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나 온화하셨고, 젊은 시절의 모습이 살짝 보이기도 했다"며 "천국에 가신 것으로 확신한다. 어머니는 천국소망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고 전했다.

▲ 홍성언 장로가 대표로 있는 예수병원 장례식장.

교회에 본격적으로 다니면서 재미난 일화가 있다. 당시 홍 장로는 '세상 죄를 씻는다'는 생각에 3개월 간 매일 목욕탕에 들러 목욕을 했다.

홍 장로는 "술에 찌든 생활을 씻어낸다는 나름대로의 행동이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터져나올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라도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교회 출석에 더욱 애정을 쏟게된데는 가족사와 관련된 배경도 있다. 신앙을 접할 당시 가족 중 한명의 건강이 갑자기 좋지 않았는데 나음을 받는 '여호와 라파'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출석하던 산돌교회 성도들이 모여 철야기도해 준 것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감사해하고 있다.

홍 장로는 "성도들이 우리 가족을 위해 합심 기도해주는 모습을 보며 신앙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며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평생을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초신자 시절에는 모든게 어리둥절한 그였다. 복음을 처음 접한데다 기초가 없어 설교를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홍 장로는 성경을 배우며 기초를 다지고자 새벽기도회에 매일 참석했다. 1993년 과로에 따른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7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해 강해설교를 들으며 무릎제단을 쌓았다.

"20여 년 전 과로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회복하는 과정이 기적이었습니다. 보통 중풍이나 말을 못알아듣는 후유증이 온다는데 저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치료를 맡았던 전주예수병원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하더군요."

30대 후반까지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던 자신이기에 경험을 살려 전도에 힘쓰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빨리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는 전도가 일상화 돼있다.

홍 장로는 사회생활을 개인회사의 사환으로 시작했다. 알아서 일을 척척 진행하는 스타일이라 회사에서 인정을 받으며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됐고, 사장의 외근 시 수행을 도맡을 정도였다.

그러다 뜻한 바 있어 퇴사 후 장의차 운수업으로 개인사업을 시작해 현재 전주예수병원 장례식장과 주차장의 대표를 맡고 있다. 특별히 사업을 하며 수익의 일정부분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국제로타리 활동 등을 통해 장학사업과 아프리카 어린이 후원사업 등을 폭넓게 해오고 있다.

▲ 지난 10월 노회 경계문제로 인한 갈등을 청산하고 화해의 손을 들고 있는 총회장과 전북, 전주 노회 관계자들. 사진 우측에서 두번째가 홍성언 장로.

그의 사회공헌 활동을 눈여겨보던 노회 원로들이 교계에서 필요한 일꾼으로 낙점해 교계연합회 활동을 시작한 그는 전주예수병원과 한일장신대학교 등 기독교기관에 수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자신이 입고 먹을 것은 아낄지언정 기부에 있어서는 통이 큰 편이다. 실제로 그는 비교적 오래된 연식의 승용차를 몰고 옷차림이 수수해 평소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최근 전주노회장을 역임한 그는 노회원 간 화합을 도모하는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겨 평화로운 노회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또 본인의 회심과 기적을 알리는 복음전도자가 되고자 해외선교, 특별히 동북아지역 선교에 헌신하고 있기도 하다. 해외선교는 그가 계속 관심가지는 영역이다.

홍 장로는 "제가 출석하는 산돌교회가 중국 길림성에 5개 교회를 세울 때부터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성도들과 함께 옷가지와 교역자 생활비 등을 지원해왔다"며 "남은 인생도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미력하나마 국내외 선교를 돕고 싶다"고 강조했다.

한편 홍성언 장로는 부인 박은자 권사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교계와 사회 경력으로는 전주노회장,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국제로타리클럽 총재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이사와 예수대학교 감사, 한국로타리청소년연합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대의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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