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그네의 삶, 사랑만 하자

[ 예화사전 ]

안현수 목사
2015년 12월 16일(수) 15:23

북한 어린이 식량 돕기를 위하여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때아닌 3월에 내리는 눈을 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잠시 감상에 젖어 있다가 혹시 내일 아침에는 눈이 얼어 공항 가는 길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공항 근처에서 자고 출발하려고 짐을 챙겨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예정보다 한참이나 늦게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함께 기다리던 여자 승객이 왜 이렇게 버스가 늦게 오느냐고 짜증스러운 말을 하자 기사가 이런 눈 길에 제 시간에 올 수 있겠느냐고 웃으면서 말했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이미 출발지에서 탄 중년의 여자와 방금 불평을 하며 오른 젊은 여자와 기사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네 사람의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면서 정체된 차량으로 가득한 길을 우리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터널 안에서는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라디오에서는 그날 내리는 눈이 3월에 내리는 눈 중에 기상관측상 최고 기록이라고 하였다.

더군다나 천둥 번개까지 치며 함박눈이 쏟아지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강원도에서 시외버스를 운전하다 공항버스로 옮겼다는 기사는 이렇게 많이 내리는 눈은 처음이라고 했다. 짜증을 부리던 여자도 어느새 옆에 있는 여자와 다정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기사가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자 여자 승객이 자신에게 떡이 있다고 가방에서 떡을 꺼내 우리 셋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자연스럽게 '어디에 사느냐'는 대화를 시작으로 눈 속에 갇힌 버스 안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던 중 한 여자가 기사에게 조심스럽게 소변이 급하다는 말을 했다. 무려 4시간이나 버스 안에 있었으니 당연한 생리현상인 것이다. 그 여자는 어둠 컴컴한 도로 옆에서 볼일을 마친 후 쑥스러운 표정으로 올라 왔는데 머리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그러면서 오늘은 원칙이 무너지는 날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신은 열 살 연하의 부인과 사는데 성격이 너무 안 맞아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방금 볼일을 보고 온 여자가 "내 동생도 얼마 전 이혼을 했는데 후회를 한다"면서 웬만하면 같이 이해하며 사는 것이 좋다고 친절하게 인생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여자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지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고 북한 어린이 식량지원 사업으로 중국을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넓은 공간에 따로 앉아 침묵 속에서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우리들은 어느새 함께 떡을 나누고 운전석 근처로 자리를 옮겨 인생을 논하는 친구들이 되었다.

처음 본 사람들이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한번 깨닫는 날이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보면 우리는 나그네라고 하였다. 나그네의 삶을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은데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고 때리고 상처 주고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가슴 아픈 일인가.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린 날, 버스 안에서 함께 했던 그 사람들이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