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 예화사전 ]

안현수 목사
2015년 12월 09일(수) 10:53

수지에서 개척을 하기 전 나는 경기도 가평에 있는 기도원에서 원목으로 섬기며 개척을 준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나에게 잊지 못할 소중한 영적충전의 기간이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며 보냈던 그 시절은 정말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시절이었다.

그동안 분주했던 나의 삶을 돌아보며 개척을 위한 계획도 세우고 수요일과 주일 저녁에는 군목이 없는 청평 군인교회에서 설교를 했던 그 시절이 가끔 생각이 난다. 그런데 당시 주말이면 가끔 찾아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말 벗이 되어 준 허신채라는 의사 친구가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독신으로 살고 있는데 그래서 부담 없이 함께 여행도 하고 서로를 잘 이해하는, 어쩌면 주변에 가장 편안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욕심 없는 의사다. 나의 주치의이기도 하고 내 주변에 있는 목사들도 그를 찾아가 의학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지금도 그는 서울 이태원에서 내과 병원을 경영하면서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료로 진료와 치료를 해 주는 작은 슈바이처 같은 의사이다.

그날도 친구는 진료를 마치고 내가 좋아하는 의정부 부대찌게를 포장하여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직접 요리한 음식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전날 나는 나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오셨는데 아버지가 다리가 불편하셔서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와 모처럼 부모님과 오리고기로 점심을 먹었는데 기분이 좋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자 친구는 "그래도 안 목사는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니 행복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그 친구의 집에서 뵌 적이 있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그 어머니는 나를 보면 "우리 허 원장 장가 좀 보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던 분이셨다. 형제들이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기가 부담스러워하자 혼자 사는 친구가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늦게 오는 아들인지라 심심한 어머니는 노인정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지내시게 되었고 주일이면 성당에 나가는 친구를 따라 성당에 나가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 어머니를 모셔 드리고 집에 잠시 왔다가 미사가 끝날 때 쯤 모시러 갔었는데 성당에서 나오시는 어머니의 신발이 자꾸만 벗겨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잘 맞지 않는 신발을 신으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왜 내가 어머니의 신발도 제대로 못 챙겨 드렸나 하는 죄송한 생각에 그길로 어머니를 모시고 백화점에 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예쁜 신발 두 켤레를 사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내친김에 지하 식품코너에 내려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사과까지 사서 한강공원으로 향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잔디에 앉아 사과를 먹으면서 어머니는 마냥 즐거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가 잠시 시골에 있는 형님 댁에 가셨다가 하늘나라에 가셨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장례를 끝내고 어머니가 쓰시던 방에 가보니 미처 신지도 못하신 한 켤레의 예쁜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프고 죄송스러워서 친구는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왜 진작 내가 어머니의 신발도 제대로 못 챙겨 드렸는지, 그렇게 좋아하시는 사과를 자주 못 사다드렸는지, 왜 공원에 자주 모시고 가지 못했는지 후회와 반성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밤 두 불효자는 많은 참회를 하였다. 정말 효도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자식들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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