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1월 30일~12월5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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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4일(화) 17:58

월-그리스도인의 삶, 사랑
본문 : 요 13:34
찬송 : 497장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이다. 무례하고, 버릇없는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뉘우치고 돌아온, 둘째 아들 탕자에게 잔치를 벌여 환영해 주었다. 탕자를 용서해준 아버지의 사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모습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LA다저스의 투수, 커쇼 선수의 일화가 유명하다. 학창시절 커쇼는 우연히 아프리카의 실상을 영상으로 보게 된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의 수도인 루사카에 '희망의 집'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커쇼가 탈삼진 1개당 500불(50만원)을 아프리카로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한 경기당 커쇼가 잡는 탈삼진은 10개 이상이다. 한 경기당 500만원 이상을 아프리카로 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커쇼에게 사람들은 '주님의 선발 투수'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고린전서 13장을 우리는 사랑장이라고 부른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사랑을 정의내린다. 사랑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2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와 둘째,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사도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다. 예의가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신 우리 주님의 인격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 주님은 인격적이신 분이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하실 때마다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또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미워하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왜 욕심이 생길까? 이기심 때문이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한다. 욕심의 또 다른 이름은 경쟁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 경쟁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하기도 한다. 모두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오늘의 기도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철준 목사
산청교회

화-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
본문 : 요 19:17~11
찬송 : 38장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우리의 왕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잃었던 생명을 찾았다는 뜻이다.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다.
 
이러한 구원의 복음은 영원 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예정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신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 구원 받은 인간이 되어 율법과 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왕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조롱하며 빈정거린다. 총독 빌라도는 십자가에 패를 쓸 때 관례대로 죄명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의 왕이라고 새겼다. 이것은 빌라도를 하나님이 사용하셨다는 증거다. 빌라도는 자기가 쓴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고한 사람을 부당하게 처형하게끔 강요한 유대인들에게 간접적인 복수를 하게 되었고,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를 통해 전체 민족을 정죄하였다. 이렇게 된 것은 그리스도만이 진정 온 세상의 구원자이며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드러내신 것이다.
 
빌라도는 죄 패에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로 '유대인의 왕'이라 써 붙였다. 라틴어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정치적인 언어였다. 헬라어는 당시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문화적인 공용어였다. 히브리어는 당시 세계를 들끓게 한 종교적인 언어였다. 빌라도가 알지 못한 채 희롱하고 조롱하던 죄 패가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왕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하게 되었다.
 
세상은 왕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조롱과 핍박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것은 진리와 사랑을 외면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당연한 태도다. 물질과 권력을 지향하고 욕심에 이끌린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말조차 이해할 수 없다.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은 인간이 구원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하셨다. 예수님은 용서의 왕이시다. 한없는 자비로 원수조차도 사랑으로 품어주신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면 자비가 사라지고 용서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 가린다. 보혈을 의지하는 자가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말씀은 하늘 양식이 된다. 오늘 우리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관장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두려움을 내려놓고 기쁨으로 산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심령이 거룩한 성전이 되어 하늘의 빛과 생명을 나타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병옥 목사
한세영광교회

수-천국 잔치에 참여하셨습니까?
본문 : 눅 14:15~24
찬송 : 180장

이스라엘 백성의 초대관습은 잔치를 베푸는 사람이 먼저 사람들에게 잔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초청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참석할지 안 할지 주인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주인은 잔치를 준비한 후에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만 초청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 초대를 거절했다. 그러자 주인은 종들에게 시내에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각종 병자들을 데려오라고 한다. 그렇게 했는데도 자리가 남는다고 하니 이번에는 시외까지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잔치는 천국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막상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주니까 안 오는 것이다. 천국에 가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잔치를 가볍게 여기고 초청한 주인을 무시했다.  이들은 교만해서 가지 않은 것이다.
 

또 잔치에 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또 있는데 강권해서 데려와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비천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강권해서 데려와야 하는 것이다. 언약백성이며 초청받은 유대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절하자 그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고 들어갈 자격이 없는 죄인과 이방인을 데려다가 그 나라를 채우신다는 말씀이다.
 
잘 준비된 잔치에 초대받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은 기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초대에 응함으로 구원을 얻기 원하신다. 그러난 초청을 거절하면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나라로의 초청을 거절하는 이유는 재물이나 세상 것에 대한 소유 등을 더 신뢰하고 더 좋아하기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관심이 없다. 공생애 동안 죄인과 세리와 죄인을 부르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모든 죄인을 부르신다. 아무 자격이 없어도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르신다.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그 나라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은혜의 나라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항상 주님께 감사하며 계속해서 하나님나라의 만찬에 사람들을 초청해 만찬석이 다 차기까지 선교의 사명을 다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셔서 큰 복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기 목사
보길교회

목-약함의 은총
본문 : 고후 12:9
찬송 : 484장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은총의 길을 걷는 축복의 백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은총을 주신다. 그 중에 꼭 깨달아야 할 한 가지 소중한 은총은 '약함의 은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의 삶에 다가오는 고난과 그 고난으로 경험하는 인생의 약함도 선이 되게 하시고 은총이 되게 하신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그토록 위대한 바울에게도 고난이 있었고 그 고난은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되어 바울을 약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도 고난과 그로 인한 약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코 그의 믿음이나 헌신이 부족하여 생긴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때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 고난 가운데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응답이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응답을 통하여 고난도 약함도 하나님의 은총임을 깨닫게 된다.


첫째로 고난과 약함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통로'이기에 은총이다. 바울에게 찾아온 육체의 약함은 자신의 교만과 인간적으로 의지했던 모든 것이 깨어지는 기회가 되었다.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약함은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었다. 바울은 사실 과거에 인간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종의 길을 걸으면서 경험한 수많은 고난과 약함은 결국 돌아보니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깨뜨리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였다. 그래서 약함이 결국 은혜였던 것이다.
 
둘째로 고난과 약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이기에 은총이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서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었고 결국에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의 고난과 약함은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그의 삶에 이루어지는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은혜였다. 실제로 우리는 형통할 때보다 질병과 위기와 실패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고 마침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고난과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기회이기에 은총이다. 수많은 고난과 약함을 경험한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함이라"고 말하였다.
 
약함이 아니면 경험하지 못할 하나님의 능력들이 분명히 있다. 혹 가시가 있는가? 그로 인해 인생의 약함 가운데 아파하고 있는가? 바울처럼 가시를 은혜로, 약함을 은총으로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인생의 다가오는 모든 고난과 약함 가운데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그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신일 목사
신내성화교회

금-바울처럼 살 순 없을까?
본문 : 행 20:17~25
찬송 : 529장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눈물로서 사역을 충성되게 감당했다. 자신있게 자기의 사역을 말할 수 있었고 "나를 본 받으라"고 한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고, 시련을 겪었다. 믿음 약한 성도라면 열 번 백번이라도 이 길을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끝까지 사명을 감당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결단하게 했고 굳세게 한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울을 먼저 찾아 오셨고 부르셨고, 택하셨다는 고백이다. 바울이 사명자가 된 것은 인간적인 순간의 감정으로 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박해를 피해 멀리 도망치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고소하려고 다메섹까지 좇아갔을 때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회심했다.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사명,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주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울처럼 사는 것일까?
 
겸손해야 한다. 바울은 사도로서 수많은 기사와 기적을 일으켰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이 완전무결하게 되면 교만할까 염려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권리나 영광을 지나치게 주장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자세이다. 겸손은 자기비하, 비굴,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눈물의 사역을 해야 한다. 바울은 생명 걸고 전하는 복음을 자기 동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심히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렸다. 아시아에서 삼년 반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서 증거했다. 빌립도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예수님도 여러번 눈물을 흘리셨다. 눈물은 사랑의 표현이다. 눈물은 하소연 이다. 눈물은 간절한 소원이다. 죽은 교회, 죽은 사명자에게는 눈물이 없다. 하나님은 눈물에 약한 분이다.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고 충성하고 섬기는 자를 돌아보심을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참아야 한다.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기와 같다. 마라톤을 하면 나를 바라보는 눈, 나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 때문에 끝까지 참고 경주에 임하게 된다. 나만 생각하고 직분과 사명, 역할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나를 바라보는 허다한 증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믿음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사명자들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바울이 주님을 본받아 참고 또 참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했듯이 참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나를 찾아와 사명을 주신 주여, 사명의 열정으로 뜨거워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유성상 목사
만리포교회

토-베드로의 실패와 회복
본문 : 요 21:15~17
찬송 : 281장

인생에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성공과 영원한 실패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해 보자. 가룟 유다는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은 30에 스승을 판다. 유다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선택이 유다에게 실패였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회복의 기회는 없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서 몇번의 경고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베드로는 실패가 많은 인물이었다. 하루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해되지 않는 말씀임에도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순종의 결과는 두 배에 가득 채울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다. 베드로는 즉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고백한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만남을 통해 베드로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베드로의 가장 큰 실패는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이다. 이 일로 베드로는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3번의 같은 질문을 통해 베드로를 회복시키신다. 이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인생의 깊은 곳은 어디일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는 곳이 아닐까? 인생의 실패가 있는 곳에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깊은 사랑으로 부르시고 실패의 자리에서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시며, 영생을 주신다.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나름대로 잘 한다고 여겼던 신앙의 실패는 우리를 세상으로 돌아가 방황하게 만든다. 그때 주님은 찾아오셔서 물으신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10번이면 10번, 100번이면 100번 물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실패가 아닌 성공한 신앙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성주 목사
솔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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