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의 자립과 폐원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정부 지원 늘고, 어린이 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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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7일(화) 14:11

한아협 산하시설의 자립은 기금 비축이나 각 시설의 대책 마련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현실화 됐다. 가장 먼저 후원 종료를 자발적으로 요청한 시설은 광주 보이스타운이었다. 1986년 광주 보이스타운은 외부 후원금을 받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고, 이에 따라 KNH후원을 자발적으로 중단시켰다. 또 기금 조성에 참여했던 우도유아원은 1987년 유치원 시설인가를 받아 제주시의 지원을 받게 됐다. 더 이상 KNH의 후원을 받지 않고도 운영이 가능해지자 우도유아원에 지원되던 KNH 후원금은 극빈학생 장학금과 교육비로 전환됐다. 1989년 후반부터 구세군 속초유아원 후원도 중단됐다.

정부 보조를 받으며 자립하는 시설들이 하나 둘 생기자 시설장들은 정부지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9년 11월 24일 세미나에 참석한 시설장들은 세미나와는 별도의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정부의 탁아지원과 관련해 시설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이 점검됐다. 일 년 후 1990년 11월에 열린 시설장 회의에서도 같은 안건이 다뤄졌다. 

자립대책을 전혀 세울 수 없었던 황지교회 늘봄의집을 위해서 1988년 한아협 임원들은 독일 후원단체의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KNH가 아닌 또 다른 후원단체의 지원을 받음으로서 늘봄의집에 대한 한아협의 후원도 중단됐다. 

KNH의 한아협 산하시설 후원 중단은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장안제이유아원의 원아들이 점차 감소했고, 그 지역 입학 전 어린이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유아원 존폐 문제가 1989년 10월 한아협 운영위원회 임원회에서 논의됐고, 1990년에 장안제이유아원의 폐원됐다. 후원은 한 해 더 연장돼 1991년 2월 중단됐다. 1990년 말 장안제이유아원 원장과 원아들은 그 동안 후원해 준 KNH와 후원자들에게 감사편지를 보냈다. 아이들과 교사들의 손때가 묻은 교육기자재는 인천 베다니교회 공부방에 기증됐다. 유아원 건물은 국내 기부금으로 구입된 것이므로 매각됐고, 매각 대금은 한아협 사무실의 임대료로 사용됐다. 

광야어린이선교원 후원도 중단됐다. 선교원이 속해 있는 백마교회는 사정상 장소를 이전해야 했다. 그런데 그 곳은 매우 협소해 선교원이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탁아 프로그램은 지역사회 주민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었기에 다른 방법이 모색돼야 했다. 해결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잠정적으로 탁아 프로그램은 중단됐다. 1990년 12월 광야어린이선교원의 감사편지가 KNH에 우송됐다. 구세군 캐더린유아원은 후원을 받지 않고도 운영이 가능해져 1991년 3월 후원이 종결됐다. 

후원 종결이 계속되는 동안 새롭게 후원이 시작된 시설도 있었다. 소성교회 유아원에 1990년 4월부터 KNH 후원금이 지원됐다. 그러나 KNH의 후원금으로도 유아원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해소되지는 않았고, 교사 2명 중 1명이 유아원을 떠났다. 남은 사람도 봉급이 너무 낮아서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KNH의 후원금으로 더 나은 봉급을 지불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욱이 주민들의 이사도 잦아 원아들은 20명으로 감소됐다. 결국 1991년 6월 말 운영을 중단했다. 한아협에서는 국내 모금활동을 통해 소성교회 유아원에 도움을 줄만한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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