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첫 목회지

[ 목양칼럼 ]

백남운 목사
2015년 11월 10일(화) 16:34

신대원 3학년 때 제63회기 총회에서 '1979년도부터 졸업하는 신학생들은 개척교회나 단독목회 1년 이상을 의무적으로 해야 목사안수 조건이 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 신세들이 된 것이다(3년이 지난 후에는 대도시교회 부교역자 수급이 모자라 1년 이상의 의무적인 조건을 무효화시켰다. 그러니 총회 정책 방향이 대도시 대형교회 성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나는 72기, 곧 1979년 2월에 졸업하는 신학생으로 이러한 규정에 적용된 첫 케이스가 되었다. 신대원 몇 명 되지도 않은 동기들이 유학, 농촌교회 당회장, 개척교회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나는 새문안교회 전도사로 부름 받아 청년들과 함께 구로동 공단지역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하고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와 함께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개척 3개월 만에 70여 명이나 모이며 교회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부흥했다. 그러나 청년들과 근로자들과의 갈등, 관리 소홀로 내부 싸움이 일어나 교인 절반 이상이 흩어졌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목회자의 어려움을 알게 된 남아 있는 교인들이 더욱 목회자의 편이 되었지만 새문안교회 청년들과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이러한 시간 동안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는 경력이 되었기에 교회를 떠나려고 준비했지만 교인들의 강력한 저지에 부딪쳐 떠나지 못하고 1년을 더 시무하게 되었다.

대학원을 공부하면서 "주님 공부가 너무 어려워(독일어 시험) 2년 만에 졸업하면 첫번째로 부르시는 곳에 가겠습니다"라고 철없는 서원(?) 기도를 하였다. 주님은 주님께 유익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서정운 교수님께서 "백남운이 너 나와 함께 한남대학으로 가자." "교수님 아닙니다. 저는 목회하려고 신학 했습니다. 3, 40명이 모이는 곳이라도 소개해 주세요."

종합시험을 합격하고 밖으로 나오니 룸메이트 박동현 전도사가 "백형 제주도 안가실래요?" 처음 부른 곳이었다. "그래 간다".

기도 한대로 장년 3, 40명이 모이는 곳이었다. 제주도에 부임하자마자 이튿날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교회 지붕이 날아가는 것 같아 기도하다 말고 밖에 나가 교회 지붕을 쳐다보고 들어와 "주님 왜 이렇게 무섭습니까? 그래도 3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 주세요".

제주도에 간다고 하니 유일하게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님께서만 "가 있어"라고 하셨다. 새문안교회를 은퇴하시고 숭실대학교 총장으로 계신 강신명 목사님께 인사 드리러 갔더니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시고, 앉아 있으라고 하시면서 1시간 이상 전화를 하시더니 "이번 주에는 조금 어렵겠고 다음 주에 이사 올 수 있지. 교회 장로님들과 당회를 다 마쳤으니 다음 주에 이사오도록 하라"고 하셨다.

교회는 상당히 규모가 있는 교회였다. 묵묵부답한 나에게 "백 목사, 양이 안차지? 5년 정도 있다가 중앙지로 나와"하신다. 그래서 목사님께 "목사님 제가 제주도에서 3년은 있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요" "그래 그럼 1년 더있어" 하셨는데 1년 안에 강신명 목사님께서 소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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