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위한 선교, 선교를 위한 예배

[ 논단 ]

최갑도 목사
2015년 11월 04일(수) 14:50

과거의 많은 예배학자나 선교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예배와 선교는 각각 별개의 신학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예배와 선교를 각각 독립된 방에 격리시켜 버렸다. 그 결과 예배와 선교는 서로 반대방향을 향하여 평행선을 그어 별개의 원리처럼 인식되었다.

오늘도 선교에 관심이 없는 학자들은 선교를 일종의 행동주의로 보고 예배의 부속물로 밖에 취급하지 않으며 또한 예배에 대한 관심이 희박한 학자들은 예배는 의시적인 내향성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신약 성서는 예배와 선교의 일치를 강조한다. 복음서에 보면 선교에 관한 용어와 예배에 관한 용어를 같이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2장 49절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는 선교에 관한 표현이다.

요한복음서 6장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는 예배와 관련된 표현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 57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예배와 선교를 동시에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훈은 선교와 예배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통일성 있는 전체로 표시하였다. 예배와 선교의 일치성을 무시하고 어느 한쪽을 고립시킬 때 예배와 선교의 참된 정신과 목적은 상실된다.

예배한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의식을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또 그것을 생활 전 차원에 적응시킬 때 예배의 진정한 정신이 살게 된다. 왜냐하면 예배는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 즉 초월적인 하나님과 이 세상을 향한 선교가 조화를 이룰 때에만 진정한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선교에 고립시키거나 유리시킬 때 예배는 내향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반면에 선교를 예배에서 고립시키거나 유리시킬 때 그 선교 자체는 인간 예찬과 자기 과장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선교는 인간의 자존심과 자기의식에 지배되어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고 선교의 중심을 잃게 된다. 선교는 예배하는 중에서 참된 선교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와 선교는 두 영역으로 분리하거나 어느 한쪽으로 고립되지 않고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룰 때 둘 다 살아있는 의미를 갖게 된다. 고로 예수님은 이 문제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마태복음 5장 23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하셨다. 이 말씀 속에 예배와 선교 두 차원의 일치를 본다.

예배의 수직적인 차원에 참여하는 일, 즉 제단에 재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일과 또는 예물을 제단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 하는 형제애는 완전히 조화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들의 일치와 조화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킨 그리스도의 화해의 원리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화해의 원리에서 본 예배와 선교의 개념은 본래 같은 차원의 양면이었던 것이 교회생활에 있어서 서로 고립된 부분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예배와 선교의 일치성과 조화를 재검토하고 재발견하여 예배를 위한 선교, 선교를 위한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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