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아들의 눈에도 성자셨죠"

[ 인터뷰 ] 고 방지일 목사 1주기에 만난 장남 방선주 박사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5년 11월 02일(월) 15:54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었는데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안나요. 그냥 집에 가면 뵐 수 있을 것 같네요. 아직도 곁에 계신 것 같아요. 아쉬운 점은 살아계실 때 대화를 더 많이 나누지 못했다는 거예요."
 
지난달 26일 방지일 선교신학 연구논문 발표회장에서 만난 고 방지일 목사의 장남 방선주 박사(83세)는 아버지의 선교신학에 대한 논문을 경청하며 아버지를 기리는 후학들의 노력에 연신 감사의 뜻을 표했다.
 
목회자로서의 방지일 목사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방 목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방선주 박사는 "영어로 표현하자면 세인트(Saintㆍ성자) 그 자체였다"며 "중국 산동 선교지에서 중국인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너무 바쁜 나머지 가정에서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셨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방 박사에게 아버지는 직접 행동으로 본을 보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체질적으로 약하신 분이셨어요. 체력도 약하시고. 그런데 선교지에서 수혈이 필요한 중국인들에게 몇번이고 수혈을 하고 그때마다 까무러치시는 것을 봤죠. 어떻게 저 사람들을 그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어요."
 
방 박사는 한국 숭실대학교와 고려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으며, 캐나다 토론토에서 중국 서주(西周)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도 방 박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목사셔서 장남인 제가 신학하기를 분명히 바라셨을텐데도 저에게 신학을 하라는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며 "아들의 뜻을 존중해주는 아버지였다"고 회고했다.
 
방 박사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내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한국근현대사 관련 사료의 보물창고라고 일컫는 미국국립문서기록청(NARA)에서 수십년간 한국에 관련된 근현대사 자료를 조사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그가 찾아낸 자료 중 정식으로 간행된 것이 300권에 이르고, 발굴한 자료는 무려 150만 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가운데 그가 발굴한 자료를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며, 국사편찬위원회도 그가 보낸 자료로 큰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국사편찬위원회의 추천으로 지난 2006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지난 1998년에는 아버지 방지일 목사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아 부자가 모두 국가의 훈장을 받은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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