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1월 2~7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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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9일(목) 11:43

월-내 삶 속에 성령님은 누구신가?
본문 : 요 14:26
찬송 : 190장

박지성 선수는 축구선수로서 여러 가지로 불리한 요소가 많다. 그러나 그는 왜소한 체격, 작은 키, 평발의 약점을 극복하고 축구의 거장이 되었다. 그의 성공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성실함과 꾸준한 노력을 꼽는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성실함과 꾸준한 노력을 하면 영적 거장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서 박지성 선수 같은 성실한 자세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기복이 심했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더니 결국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을 경험하고 초대교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거듭났다. 그가 경험한 것은 '성령세례'였다.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의 모습에 대해 사도행전에서는 '놀랐다. 당황했다. 조롱했다. 새술에 취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는 예전과 다르게 너무도 담대하게, 강력하게, 능력있게 말씀을 선포했다.
 
그는 성령께 사로잡혔던 것이다. 성령은 파라클레토스, '옆에서 돕는 자'라는 뜻이다. 돕는 자의 위치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단순한 보조자로서 돕는 자이고 또 하나는 주도적으로 돕는 자이다. 보조자로서 돕는 자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조금 불편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은 주도적으로 돕고 초월적으로 돕는 것을 말한다. 초월적으로 돕는다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돕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가다가 홍해가 갈라지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는 도우심을 초월적 도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했다. 곧 주도적으로 도와주시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성령께서 모든 사역을 다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마치고 평가를 할 때 홍보, 재정, 행정, 인사배치 등을 골고루 점검한다.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점검하지 않는다. 바로 '성령께서 얼마나 역사하셨는가?'의 문제다.
 
초대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였다. 우리 삶에 성령께서 일하실 공간을 만들어 드려야 한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지식으로, 경험으로 가두어 놓고 내가 주인이 되어 일할 때가 많다. 다시금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대한다면 초대교회 역사하셨던 성령님을 그분이 계셔야 할 그 자리로 모셔들여야 한다. 주도적으로 초월적으로 도우실 성령을 기대하며 나아가자!
 
오늘의 기도
 
성령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내가 일하지 않고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초월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믿음의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정우 목사
시온교회

화-모험적인 순종
본문 :요 21:1~11
찬송 : 449장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을 통해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과 함께 3년간이나 숙식하며 지내왔지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들 제 갈 길로 갔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렇게도 믿음이 좋던 베드로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옛 본업인 어부로 되돌아가는 불신앙을 보여준다. '사람 낚는 어부'에서 '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간 그들은, 뱉어 놓은 것을 다시 먹는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이었다.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을 향하여 간 제자들에게 다가온 것이 무엇인가? 성공과 안식이 아니었다. 실패와 좌절이었다.
 
3절, 5절을 보면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라고 했다. 왜 물고기를 잡지 못했을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명령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다. 긴 밤 시간 동안 수없이 그물을 던지고 실패한 곳이지만, 순종하여 던진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고기를 일백쉰세마리나 잡았다. 제자들의 순종은 기적을 창조했다. 제자들의 순종은 모험적인 순종이었다. 고기 잡는 전문가가 비전문가의 말을 듣고 따른다는 것은 모험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의 인생 자체가 모험인 것 같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그렇다.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존재는 부모님도 아니요, 선생님도 아니요, 예언 하는 사람도 아니다. 나를 지으시고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이 나보다 능력 있으신 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맡기든지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때로는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일용할 양식과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고 따라간다면, 주님이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모험적인 믿음이다.
 
오늘 우리는 모험적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나를 살리시고,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신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생의 바다에 믿음의 그물을 깊이 던지게 하시고, 믿음의 기쁨과 열매를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덕 목사
화정교회

수-기적을 원하는가?

본문 : 막 5:25~34
찬송 : 471장

여인은 12년이란 긴 세월 동안 혈루증 앓았다. 다행히 치료받을 수 있을 정도의 물질은 있었다. 훌륭한 의사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의사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치료와 처방으로 고통만 심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랜 투병에 가진 재물이 바닥이 났다. 병은 오히려 더 중해졌다. 이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을 만남으로 기적이 일어났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여인같이 절망을 뛰어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첫째, 말씀을 듣자.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를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들었다. 말씀을 들을 때 복을 받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 1:3)"고 했다. 귀로 들은 말씀이 심령에 머무르고, 눈으로 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을 때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기 시작하시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다.
 
둘째, 주님께 나아가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셋째, 입으로 시인하자.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혈루 근원이 곧 말라버렸고 병에서 해방되었다. 그 때 주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다. 여인은 두려운 마음으로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더 큰 은혜를 베푸셨다. 받은 은혜를 입으로 시인할 때 온전한 은혜가 되어지고 더 큰 복이 임한다. 받은 복을 세어보시고 입으로 시인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주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고 믿어지게 하옵소서. 말씀이 삶의 양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국환 목사
대구효촌교회

목-금송아지 교회

본문 : 출 32:1~8
찬송 : 402장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거하고, 백성들은 모세가 내려오기만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무려 40일을 꼬빡 기다리면서 백성들 사이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백성들 입장에서 하나님은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하나님은 접근 불가한 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게 된다.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을 만들라…" 이 얼마나 어이없는 얘기인가? 자기들이 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잘 새겨보면 하나님이 저 위에 계시긴 계시는데, 너무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고, 접근 불가의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늘 가까이 하고,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만들자는 것이다.
 
자기들이 만들었으니까 자기들 손아귀에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그런 신이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속성이고 본질이다. '편하게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하나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진정한 하나님 보다는 금송아지 신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너무 두렵고, 높으시고, 감당이 안된다. 그래서 내가 접근하고, 만질 수 있는 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또 한 가지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게 된 동기가 있다. "우리를 인도할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애굽에서 배운대로 한 것이다. 애굽에서는 송아지를 미래를 인도하는 신으로 섬겼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방식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내가 편한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그 분을 만나려면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분과 만나기에 걸맞는 준비를 하고 그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복을 입고, 갖출 것을 갖추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왜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할 때 그것이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도구로 삼으면 안된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시는 삶이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뜻 내 경험보다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순종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영철 목사
명성제일교회

금-인생의 십일조를 드려라!
본문 : 눅 11:37~44
찬송 : 524장

십일조 설교를 듣고 십일조 헌금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한 집사님의 말을 듣고 너무나 기뻤다.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성도가 늘어서가 아니라 십일조 헌금은 우리가 돌아야 할 중요한 신앙의 반환점이기 때문이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중간에 있는 반환점을 돌아 출발했던 장소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십일조 헌금은 참 귀한 일이지만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할 더 어려운 과정이 하나 남아 있다. 십일조 헌금이라는 중대한 반환점을 돌았으면 그 다음에 신앙의 길을 쭉 달려가기 위해 한 가지 더 결단해야 할 일, 그것은 인생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이다. '십일조 헌금만 하면 다 된다'라는 생각에 안주해선 안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어느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예수님이 식사 하시기 전에 손을 안 씻은 것이 문제가 된다. 종교적인 차원, 율법적인 차원의 문제제기다. 유대교는 '정결법'과 수많은 율법조항을 만들어 이를 철저히 지켰고, 어떤 이유에서든 이 조항을 어기면 죄인이라는 비난과 정죄를 받았다. 주님은 이런 바리새인의 속마음을 읽고 말씀하신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은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속에는 욕심과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한 예가 바로 십일조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본디 구약에서는 곡식, 포도주, 기름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해서만 십일조를 하라고 규정하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규정을 더 세분하여 사소한 것까지, 심지어 땔감 나무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예수님이 지적한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도 이런 맥락이다. 향신료까지 십일조를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성경이 요구하지도 않는 십일조 항목을 만들어 강요하면서 정작 하나님께 바쳐야 할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저버렸다는 것이다.
 
주님은 십일조도 좋지만 공의와 사랑, 정의롭게 살아가는 삶과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 진정 하나님이 받기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오늘날도 '나는 헌금 철저하게 드리고, 교회 안 빠지고, 봉사도 잘 하니 이만하면 정말 예수 잘 믿는 거야'라며 스스로 만족하며 사는 성도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은 속으로 드리는 십일조, 즉 삶의 십일조, 인생의 십일조이다. 최종적으로 내 인생 전체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신앙의 결승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오늘의 기도
 
물질, 시간, 충성, 내 인생 전체까지 내 모든 소유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토-혼자가 아니다
본문 : 눅 19:1~10
찬송 : 410장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의로운 자' 또는 '순수한 자'이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과 달리 '불의한 자' 내지 '불순한 자'로 통했다. 그의 직업이 세리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세리를 매국노라 불렀다. 삭개오는 부자였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지금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는가? 친구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가? 회사에서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 마음고생 중인가? 공동체에서 나만 소외시키는 것 같은가? 하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당신을 기억해 주는 이가 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 또는 자신같이 알아주는 이 없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가까이 하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체통을 불구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기다렸다. 때마침 예수님이 오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얼마 만에 들어본 이름인가? 다정하고 사랑스런 목소리.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경멸하고, 조소하고, 무시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심으로 사랑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로 "삭개오야!" 라고 부르시고 있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 "사랑스런 OO아! 너는 혼자가 아니야!"
 
삭개오는 부드러운 예수님의 목소리에 즉각적으로 응답한다. 자기 집으로 모시고 들어가서는 극진한 대접을 한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건만 예수님은 신경쓰지 않으셨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 앞에 삭개오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한 번의 만남으로 삭개오의 인생이 달라진다.
 
예수님의 관심이 삭개오를 살렸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분명하다. 예수님처럼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는 외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혼자라고 생각하고 숨어 지내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 곁에는 내가 있을게요"라고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기도
 
주님으로 인해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위로 받았으니 나도 다른 사람의 힘이 되어주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찬규 목사
장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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