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0월 26~3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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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1일(수) 17:03

월-기본이 든든한 교회
본문 : 벧전 3:8~17
찬송 : 206장

강원도 고성에서 산불이 일어난 적이 있다. 수많은 가축들이 불에 타죽었다. 이상하게도 야생동물들의 시체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산불이 일어나서 가축의 주인들이 도망가라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도 다 죽었다. 갇혀 살았기 때문에 위기에 대처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것이다. 가축들은 거의 울타리 근처에서 타죽었다.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타죽은 것이다. 이것이 죽은 공동체다.
 
죽은 공동체는 자생력이 없다. 남이 먹여 주고, 남이 보호해준다. 위기상황이 닥치면 헤쳐나가지 못한다. 초대교회는 살아있는 공동체였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기도하고, 깨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깨어있지 않고, 죽어 있으면 시험과 연단을 주시므로 자극을 주신다. 시험이 없으면 사생자라 했다. 전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자생력이 없는 교회다. 깨어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첫째로 의로운 공동체이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12)…" 주의 눈이 의인을 향하신다는 것은 의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계신다는 말이다. 의인을 보호하시고, 의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그러면 의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3:9)." 로마황제 네로의 압제상황에서도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라는 것이다.
 
둘째로 말씀의 진리를 소유한 공동체가 되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세상 사람들이 묻는다는 것이다. "너희는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가느냐? 무슨 낙으로 살아가느냐?"라고 묻는다. 교회는 확신과 소망을 세상을 향해서 보여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보여주지 못할 때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등을 돌린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잠 29:18)"
 
세 번째로 교회는 훈련공동체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10)."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우리의 삶이 행복하고 좋은 날을 기대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혀를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흩어져 있는 12지파의 성도들에 무엇보다 혀를 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도 사건도 아닌, 사상을 얘기한다. 사상이란 사람과 사건의 본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깊은 얘기를 하고, 생산적인 것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한다. 교회는 사건이나 사람을 얘기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말씀을, 은혜를 나누는 곳이다.
 
오늘의 기도
 
교회다운 교회로 늘 꺠깨어있게 하시고 이 시대를 선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영철 목사
명성제일교회

화-우리가 살 길
본문 :삼상 7:3~6
찬송 : 187장

링컨과 나폴레옹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지만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링컨은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물려준 믿음으로 살다가 16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반면 나폴레옹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살다가 끝내는 귀양살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인생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신앙의 길과 자기 힘으로 사는 세상의 길이 있다. 신앙의 길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생명의 길이다. 세상의 길은 눈에 잘 보이고 쉬운 길이지만 죽음의 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신앙의 길을 걷지 않아서 삶은 피폐했다. 주변의 나라들의 침략으로 늘 불안에 떨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하였고 계시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모았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싸움에서 승리케 해주셨다. 오늘 우리도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기를 원하는가?


첫째, 물을 길어 제단에 붓자. 미스바에 모인 백성들은 물을 길어 제단에 부었다. 우리가 섬기는 제단의 눈물을 뿌려야 한다.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 회개의 눈물을 붓자.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을 제단에 뿌리자.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처럼 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처럼 사명을 위한 기도의 눈물을 제단에 흘리자. 이것이 나 자신이 살고 가족이 살고 민족과 나라가 사는 길이다.
 
둘째, 금식하자.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했다. 금식은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민족의 위기 앞에서 에스더는 금식을 결심하고 백성들도 동참했을 때 유다백성을 살길을 얻었다. 그러나 진정한 금식은 밥을 먹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믿음을 실천하는 삶이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먹고 즐긴다. 이제는 내가 즐기던 세상의 것을 금식하고 말씀의 맛을 느끼자.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을 금식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아보자.
 
셋째, 회개하자. 죄는 덮어두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회개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회개할 때만이 성령이 임한다. 성령이 임하면 살길이 열린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회개로 시작되었다. 다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개인과 나라와 민족의 죄를 깨끗이 회개하자. 이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오늘의 기도
 
세상 길을 걸었던 잘못을 깨달아 신앙의 길로 돌아서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국환 목사
대구효촌교회

수-시간의 십일조를 드려라
본문 : 시 90:1~12
찬송 : 552장

하나님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늘 시간을 나를 위해 쓰는데도 모자라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빡빡한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도 있다.
 
십일조 신앙이 무엇인가? 내가 가진 모든 소유는 하나님 것이며,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내 소유는 물질만이 아니다. 우리는 돈보다 더 소중한 시간을 십일조 신앙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신다. "너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내게 쪼개어 바쳤으니 내가 참 기쁘다"라고 하실 것이다.
 나는 하루 24시간, 1주일 168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생활계획표를 한 번 그려보자.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자는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1주일을 보내고, 또 한 달을 보내시는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과연 그 하루 24시간, 1주일 168시간 중에 나는 하나님을 위해 몇 시간이나 사용하며 사는지 점검해 보자.
 
오늘 본문인 시편 90편에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며 그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시간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고 시간을 소유하고 주관하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고 귀하기에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 즉 시간을 잘 계산하고 헤아려, 그 아깝고 소중한 시간을 잘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잘 관리하는 최고의 지혜가 바로 '시간의 십일조'다. 시간의 십일조도 '우선권의 문제'다. 하루 24시간 중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 먼저 떼어놓고 남은 시간을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시간의 십일조다. 하나님 최우선이 진정한 십일조 신앙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시간 십일조까지 드리며 사는데도 누구 못지않게 잘 살고 형통하는 비결이 뭘까? 바로 '시간의 질'이다. 하나님이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상하시고 어떤 상급을 주시느냐? 바로 시간의 질을, 수준을 다르게 하신다. 하루 24시간은 똑같지만 하나님은 그 똑같은 시간의 양을 질적으로 다르게 하셔서, 같은 24시간이라도 값지게 하시고, 같은 한 시간이라도 전혀 수준이 다르게 만드신다. 소중한 시간이 낭비되지 않게 해주신다.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물질, 시간, 충성, 생명, 나의 모든 소유를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복과 귀한 사명 받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목-지금 살아있음은 은혜이다
본문 : 고전 15:1~11
찬송 : 295장 


오늘 말씀 속에서 바울은 아주 훌륭한 고백을 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은혜이다. 은혜를 입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머니, 아버지, 선생님, 친구, 이웃, 교회의 은혜 등 은혜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내가 잘나서, 노력해서, 나의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착각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생각하는 은혜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죄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3)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찾아와 주셨다는 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찾아와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이때의 경험은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경험이었다. 구원과 관계없는 사울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과거에는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대속해 주셨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 나로 나 된 것은 주님의 속죄의 은혜이다. 은혜를 잊지 말고 날마다 찬송하자.
 
둘째, 내가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감사하고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오직 예수님의 12제자에게만 붙여졌던 칭호였다. 바울이 감당할 수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을 맡겨 주신 것이 은혜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추노꾼 같은 바울에게 사도의 일을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도 바울을 믿었다. 그 믿음이 사도 바울을 더욱 변화시켜서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 오늘 내가 주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이다.
 
셋째, 모두 주님이 하시니 은혜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일을 감당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이는 단순히 겸손한 표현이 아니다. 바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이다. 이런 고백이 우리들도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나를 구원하시고 귀중한 직분을 맡겨주심에 감사합니다. 또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찬규 목사
장동교회

금-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본문 : 시 18:1~6
찬송 : 375장

우리는 힘이라는 것을 내가 소유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참된 힘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위탁되는 것이다. 힘이란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그 힘을 만들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힘이란 일정한 시간에 절대 힘의 소유자로부터 빌려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고, 일할 때가 정해져 있고, 은퇴라는 것이 있다. 대통령도, 기업의 회장도, 사업도, 직위도, 모두 나에게 위탁된 힘을 가지고 일정한 기간 동안 일하는 것이다.

 
참된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산 사람이 다윗이다. 다윗의 일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사울왕의 미움과 신하들의 모함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도망을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도피자의 생활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과 그의 원수들을 제압하고 통일 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도록 섭리했다. 이러한 안정된 상황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회고하면서 승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시를 읊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8편에는 수많은 위기와 환난 속에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속에서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표현한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 다윗은 모두 일곱 번에 걸쳐 하나님을 비유적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다윗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윗을 구원하여 주시는 힘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시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위대한 능력을 가져다준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삿 5:31)."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은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힘을 가진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으며,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다윗에게 힘이 되어 주셨듯이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할 때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덕 목사
화정교회

토-전도 현장에 가보았나?
본문 : 요 4:35~38
찬송 : 496장

탁상행정이라는 말이 있다. 현장의 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현실성 없는 행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도 탁상행정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 방황하는 영혼, 죽어가는 영혼, 상처 입은 영혼이 있는 전도현장에 가지 않고 교회와 집만 왔다 갔다 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의 백성으로 부르셨지만 궁극적으로 전도자, 증인으로 세상에 파송하셨다. 전도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면 두 가지 정도를 이유로 내세운다. 하나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마땅히 전도할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는 답변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거의 없다.
 
참 아이러니컬하다. 전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거나 정말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가 연구실에 있고, 엔지니어가 기계실에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전도현장에 있어야 한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 기도하시고 난 후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서 전도하셨다. 특히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사마리아에 가서도 우물가의 여인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셨다. 바울은 전도현장에서 약하고 두려워 떨었던 경험이 있다. 베드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히 복음을 전했다. 12제자는 대부분 전도하다가 순교했다. 내 삶속에 전도현장의 경험이 얼마나 있는가? 요한복음 4장에서는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두었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것에 단지 참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직접적인 열매가 없다고 하더라도 심는 사람, 뿌리는 사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노력하는 것에 동참하는 사람이라도 되어야 한다.
 
주님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 즉 영혼의 추수가 될때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기 원한다고 하셨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요 4:36)."
 
전도는 절대 탁상행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의 백성으로 부르셨고 다시 세상으로 전도자로 파송하셨다는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갖는 전도자로 거듭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정우 목사
시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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