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성령의 도우심 없이 깨달을 수 없나니

[ 이야기가 있는 예배 ]

김명실 교수
2015년 10월 20일(화) 10:35

말씀을 전하기 전에 꼭 기도해야 한다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러나 설교의 흐름을 깨는 불필요한 기도라고 지적하거나, 논쟁거리가 못되니 설교자 재량에 맡겨야한다는 목회자들도 있다. 어쩌면 진부해 보일 수도 있는 논쟁이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응답들이 벌써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새삼 놀라게 된다.

흔히 '설교 전 기도'로 알려져 있는 이 기도의 기원은 종교개혁자 칼빈과 그의 스승 마르틴 부서에게 있다. 부서는 성경봉독과 설교가 행해질 때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음을 강조하며,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prayer for illumination)'를 개발하여 예배순서에 넣었다. 이는 이성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당시 스콜라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개혁자의 신학적 의지였다.

이것은 기독교예배의 역사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개혁신학이 예전으로 체화된 훌륭한 모범이다. 부서의 1537년 스트라스부르크 시편집에서 이 기도의 한 예문을 찾아볼 수 있다.

칼빈은 스승의 뜻을 더 발전시켜 이 기도가 반드시 성경봉독 전에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칼빈의 1542년 제네바 시편집에서 한 예문을 볼 수 있는데, 부서나 칼빈 모두 성령님께서 우리의 이성을 비춰달라는 내용이 담긴다면 목회자가 얼마든지 기도문을 만들 수 있다고 격려하였다.

츠빙글리도 시편 119편에 근거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만들기도 했으나, 이 명칭을 사용하거나 특별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18세기 감리교 찰스 웨슬리는 이 기도에 곡을 붙여 찬송을 만들기도 하였다.

현재 미국장로교(PCUSA)의 예배서와 스코틀랜드장로교 예배서가 이 기도를 그 명칭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기도가 굴절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웨스트민스트 예배모범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설교 전 기도'라는 명칭 속으로 개혁신학적 예배유산이 묻혀 버렸는데, 그 결과 우리에게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가 생소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이 기도의 신학적 의의와 명칭 그대로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비개혁전통 속에서도 활발한데, 미국감리교는 이 기도의 신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현재 그들의 공식예배서에 포함시켰다.

이제 이 소중한 전통을 한국교회도 보다 활발하게 활용할 때가 되었다. 몇몇 교회들이 이 기도를 예배순서지에 넣기 시작했는데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조명'이라는 것이 어색해서 성령의 '임재'나 '역사' 등으로 바꾸기도 하는데, 성령께서 인간 이성에 빛을 비추셔서 바르게 작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이기에 '조명' 그대로를 쓰는 것이 개혁자들의 신학적 의도에 일치하는 것이다.

 한편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는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 그리고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성령께서 변화시켜달라는 기도를 위해 붙여진 명칭이기에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와 구별되어야 한다.  개혁전통의 위대한 예배유산과 그 감동이 한국교회 속에서도 다시금 살아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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