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발음 필이 이뤄져야, 자칫 엉뚱한 의미로 전달

[ 기고 ] 회중 앞 낭독 때 의미 오인 없도록

조종팔 장로
2015년 10월 20일(화) 10:11

하나님께서 다른 동물과는 달리 특별히 우리 인간에게만 서로의 사상과 감정을 소통해서 서로 간에 원활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꽃 피워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언어를 주셨다.

각국 언어는 각각 그 나라의 사회적 약속에 의한 구체적이고 적확한 발음을 통해 정확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 이것을 어느 언어나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언어의 일반성 가운데 '언어의 사회성'이라고 한다.

정상적 언어의 그 형식은 음성이고 그 내용은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음성이면 그 어떤 음성도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생각이나 감정의 정확한 전수(傳受)를 위해서는 그 사회의 약속된 '정확한 발음'이 필히 요청된다. 이것이 모호하거나 틀린 경우에는 듣는 쪽에서 못 알아듣거나 엉뚱한 의미로 전달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어느 새벽 기도 시간에 부목사님이 성경을 봉독하면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의 구절을 읽으면서 '젖을'을 '저즐'로 읽지 않고 '저슬'로 읽고, 설교 중에도 계속 '저슬'로 발음하기에 본문을 보았기에 망정이지 보지 않고 듣기만 했으면 분명 그 뜻이 '젖' 아닌 생선을 절인 새우젓이나 멸치젓의 '젓'으로 오인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문자언어'로 된 기록을 '음성언어'로 바꾸어 주는 과정이 낭독인데 더구나 회중 앞에서의 낭독은 그 의미가 굴절되어 오인되는 일이 없도록 정확하게 읽고 또 말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내가 중ㆍ고등부 시절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시편 23편에 나오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의 '상'을 상급(賞給)의 시상(施賞)으로 오인한 적이 있는데, 현 개역 성경에는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로 되어 있어 차려진 '음식상'으로 제대로 쉽게 이해가 되지만 이 '상'을 발음할 때 장단의 구분이 분명치 않으면 청중이 오인할 소지가 충분하다.

현재 우리 국어에는 이 '장단음'을 구분하는 부호나 표시가 전혀 없는데(물론 사전에는 장음 부호가 표시되어 있지만) 훈민정음이 반포된 15세기 국어에는 글자의 왼쪽에 점을 찍어 표했는데 '左加一點則 去聲 二則 上聲 無則 平聲 入聲加點同而促急'이라 규정하여 짧고 높은 소리는 한 점을, 낮은데서 높아지는 긴소리는 두 점을, 보통의 소리는 안 찍고, 종성(받침)에 무성자음이 붙는 소리는 점을 찍는 것은 같되 다만 소리만 촉급(빨리 끝닫는다)하다고 했다.

표기는 같으면서 장단이 분명해야 그 뜻이 구별되는 이런 경우 오늘에도 이런 부호가 있었으면 보다 정확하게 발음되고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문장 속에서는 앞뒤 문맥으로 보아 뜻이 구별되지만, 단어만을 떼어 놓았을 때는 뜻을 구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말에는 이런 단어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눈(目)-눈(雪), 말(馬)-말(言), 상(床)-상(賞,像), 손(客)-손(孫), 배(梨)-배(倍), 밤(夜)-밤(栗), 종(鐘)-종(從), 감상(鑑賞)-감상(感想), 감정(鑑定)-감정(感情), 화장(化粧)-화장(火葬)…등이 그것인데 전자는 짧은 소리(거성)로 후자는 긴소리(상성)로 분명히 구분 짓지 않으면 뜻의 혼돈이 오게 마련이다.

또 체언(임자말) 밑에 붙는 받침의 연결을 잘 못 읽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한 예를 들면 '꽃을'을 '꼬츨'로 '꽃에'를 '꼬체'로 읽어야 하는데 어떤 이는 '꼬슬' '꼬세'로 또는 '꼬틀' '꼬테'로 읽는 경우이다. 체언의 끝 받침 다음에 종속적 관계의 모음이 올 때에는 그 받침을 그대로 연음 시켜 읽는 것이 원칙이다. 여기서 '종속적 관계'라 함은 제 홀로는 설 수 없는, 반드시 체언이나 어간에 붙어 쓰이는 토씨, 어미, 접미사 등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낫(鎌), 낮(晝), 낯(顔), 낟(粒), 낱(個)을 발음할 때 그 받침소리를 그대로 연음시켜야 제대로의 뜻이 분명해진다. 낫을(나슬) 갈다, 낮에(나제) 일한다, 낯이(나치) 검다, 낟을(나들) 가리다, 낱을(나틀) 세다. 이들 받침소리를 제대로 잇지 않으면 그 뜻이 달라지거나 모호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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