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신세계를 바라보며

[ 논설위원 칼럼 ]

김운성 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5년 10월 20일(화) 10:02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사역과 그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는 화해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매우 상징적인 행보를 하셨다. 그것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신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라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거기 사마리아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와 사마리아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으셨다. 사이로 지나시면서 양쪽 모두를 붙드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동일하게 대하셨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화해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매우 오래된 갈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1년 경에 앗수르에 멸망한 후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었고, 그 지역의 백성들의 신앙은 우상 종교와 섞이게 되었고, 피도 섞이게 되었다.

반면에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다. 후에 예루살렘에 귀환한 백성들은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으며, 에스라가 중심이 되어 신앙개혁운동을 했다. 이런 유대인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피와 신앙이 혼합된 북 왕국 지역의 백성들, 즉 사마리아인들과는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짐승처럼 여겼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화해자이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 예수님은 둘 중 어느 쪽 편도 아니었으며, 양편을 다 붙잡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차이보다 그들의 공통점, 즉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 모두가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셨다.

그렇게 가시다가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섞여 있는 이상한 무리를 만나셨다.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한 무리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들이 서로의 차이를 중시했다면 함께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나병환자가 되어 죽음을 앞두고 보니 출신의 차이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곧 죽을 사람들에게 출신과 이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은 그들이 차이점을 보시지 않고, 공통점을 보시고 모두 사랑하셨다.

제100회 총회의 화두는 '화해'다. 화해는 서로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볼 때 가능하다. 마더 테레사는 천주교인이든, 개신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라마교인이든 차별하지 않고 사랑의 선교회에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서 임종을 맞이해야 할 불쌍한 존재라는 공통점에 집중했다.

"주님, 우리로 화해하게 하소서!"란 주제를 가지고 출발한 우리 모두가 서로의 차이보다 공통점을 보길 원한다. 우리에게는 약함, 죄인됨, 은혜로 구원받음, 복음의 사명자, 조만간 삶을 끝낼 유한자,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형제자매란 공통점이 있다. 이런 마음으로 그 어떤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차이에서 비롯된 그 어떤 갈등에도 불구하고 서로 용서하고 끌어안길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음을 인식해야 하겠다.

김운성 목사(땅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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