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100년 맞은 '로스'(Ⅰ)

[ 기고 ] 특별기고

노영상 총장
2015년 10월 08일(목) 09:57

호남신학대학교는 개교 60년을 맞이하여, 종교개혁자로서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녹스에 의해 형성된 스코틀랜드교회의 후원으로 2015년 10월 20∼22일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호남신학대학교 대강당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려 한다. '존 로스(1842년 7월 6일∼1915년 8월 6일) 서거 100주년 기념강연: 스코틀랜드 신학에서 본 존 녹스와 존 로스'란 주제로 에든버러대학교 신학부 데이비드 퍼거슨 학장, 에든버러대학교 정교수로 선교학 전공의 브라이언 스탠리 교수, 스코틀랜드의 세인트마이클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스튜어트 길란 박사를 초청하여, 스코틀랜드 교회사에 있어 한국교회와 관련이 깊은 두 인물 곧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와 19세기의 만주 선교사 존 로스를 조명하려는 것이다.
 
서거한지 100년이 된 존 로스는 1842년 7월 6일 스코틀랜드 북부의 닉에서 양복업자인 휴 로스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71년 해외선교를 결심하게 된 그는 1872년 그의 고향인 채플힐교회에서 3월 20일 선교사로서 목사안수를 받는다. 그는 3월 25일 스튜어트와 결혼한 후, 곧 이어 4월에 선교사로서 사역을 위해 중국으로 향해 8월 23일 치푸에 도착한다. 로스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산동반도 책임자이자 연합장로교회의 중국선교부 책임을 맡고 있던, 알렉산더 윌리암스 목사가 미개척지인 만주 선교를 위해 만주의 항구도시인 뉴창에 선교본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1872년 10월에 만주에 배치된다.
 
당시 장기간의 여행과 중국의 혹독한 겨울 추위는 임신 중이었던 로스 부인의 건강을 악화시켰는바 1873년 3월 첫 아들 드루몬드를 낳고 3월 31일에 세상을 뜨고 만다. 로스는 부인을 잃은 슬픔에 좌절하지 않고 중국어를 배우는데 정열을 쏟았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1873년 5월 11일에 20분간 중국어로 첫 설교를 하게 되는 결실을 낳게 된다. 그는 만주 내지 선교를 위해 1876년 초에 만주의 수도인 선양으로 옮겨 그곳에 선교본부를 설치한다. 전도여행보다 성경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던 그에 대한 해외선교부의 압박과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인한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감 속에서도 1872년부터 은퇴하는 1910년까지 38년 동안 만주에서 선교를 하며 3개의 대학, 2개의 병원, 7개의 교회, 18개의 선교본부를 세우는 등 존 로스는 만주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만주선교사인 로스는 어떤 면에서 볼 때 한국 최초의 선교사라고도 볼 수 있다.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영국 웨일즈 출신 토마스 선교사나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선교에 큰 기여를 한 언더우드가 최초의 한국 선교사로 보통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사들에 앞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였고 그가 전도하였던 서상륜과 백홍준 등이 한국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쉐필드 대학교 한국학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를 한국 최초의 선교사 중의 한 명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1896년 아일랜드 장로교회 선교부와 연합하여 연합신학원을 세워 초대 학장 겸 교수로 사역했으며, 한국과 중국에 대한 학술적 저작들을 출판하여 서구에 동아시아를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 참석하여 만주선교에 대한 발표를 하는 등 동아시아 선교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존 로스는 정말 극동지역의 훌륭한 선교사였던바, 우리는 그의 위대한 공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노영상 총장/호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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