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 논단 ] 주간논단

김창인 목사
2015년 10월 08일(목) 09:52

요즘은 승용차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옛날에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 봇짐을 지고 주막에 묵어가며 며칠 걸려 걸어야했던 천리 길 서울도 전국 어디에서든 불과 몇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참으로 편리한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승용차가 발을 대신하다 보니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까운 마트에 가면서도 차를 몰고 다니고, 따로 시간을 내 열심히 런닝머신 위에서 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젊은 시절부터 소화기 장애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나는 목회하는 내내 남들보다 몇 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식탁의 교제'라는 하나님이 주신 참으로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내게는 늘 부담이고 고역인 때가 많았다. 특별히 별난 음식을 먹지 않아도 속이 거북한 때가 많았기 때문에 혹여 동석한 사람들이 나로 인해 불편해하지 않을까 신경써야 하는 이중고를 겪곤 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밖에서 오랜 시간 식사하는 자리를 피하게 되다 보니 결국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누는 소소한 기쁨을 누리기 어려웠다.
 
대신 건강을 위해 틈틈이 배운 테니스가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에 몸은 좀 피곤해도 곧바로 테니스코트에 나가 한 시간 가량 땀을 흘리고 나면 오히려 없던 힘이 솟는 듯 했다. 부교역자들까지 반강제적으로 참여시키다 보니 부담스럽게 여겨 뒤에서 불평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목회라는 장기간의 레이스를 놓고 볼 때 목회자들에게 이만한 좋은 운동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퇴한 후에는 따로 시간을 내 규칙적인 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매일 꽉 짜인 시간표대로 40여 년을 지내다가 전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왔지만 막상 뭔가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듯한 공허감을 떨쳐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은퇴 후에 등산이나 골프, 여행 등 새로운 취미를 갖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은 어쩐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어느덧 가까운 거리는 승용차 대신 두 다리로 걷는 운동 아닌 운동이 점차 습관이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에 복잡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천천히 걷는 것만큼 좋은 게 없을 듯싶다. 가끔 동네 주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인사도 나누고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아파트 화단이며,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한가로이 걷다보면 어느새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무겁게 짓눌렸던 몸과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지만 승용차 대신 아직 그런대로 쓸 만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와 은혜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 가고 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사랑한 교회와 열정적인 목회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은퇴라는 새로운 시간표 앞에 섰을 때, 또 오랜 시간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힘든 문제를 겪어야 했을 때도 차마 주님 앞에 내려놓지 못했던 무거운 마음의 돌덩이까지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감사와 은혜로 바꿔주셨다.
 
우리는 늘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쪼이고 살지만 그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건강을 잃거나 평안한 일상이 깨진 뒤에야 비로소 예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문득 깨닫게 된다. 아내와 자식은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공기와 햇볕에 대한 고마움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듯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 안에 살면서도 매순간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 또한 강단에서 감사와 은혜를 수없이 설교했지만 정작 삶의 여러 순간마다 공기처럼, 햇빛처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때때로 망각하고 살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지혜로운 자는 항상 배우는 사람이고, 강한 자는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며, 진정한 부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감사는 은혜 받는 그릇이라고 했다. 이 감사의 그릇이 클수록 은혜가 크게 임하고, 감사하는 그릇이 많을수록 은혜도 많이 담긴다는 뜻이다.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다고 하는데, 나는 그보다 훨씬 많은 나이를 먹도록 아직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김창인 목사/증경총회장ㆍ광성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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