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무릎으로 하는거야"

[ 목양칼럼 ] 목양칼럼

이상진 목사
2015년 10월 05일(월) 18:24

필자는 신학교육을 마치고 현재 시무하고 있는 황지중앙교회의 담임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목사안수 전이고 부교역자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없기에 조직교회인 본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어떻게 섬겨야 할지 부담도 되고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필자가 평신도 때 출석하였던 교회를 시무하셨고 당시 강릉교회를 시무하시던 김덕조 목사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그리고 목사님께 나의 목회의 멘토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고 현재의 교회 형편을 말씀드리며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물었다. 그때 김 목사님은 자신의 목회에 대한 경험들을 이야기 해 주었고 참고하라며 책도 몇 권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는 "목회는 무릎으로 하는 거야"라고 하시면서 꼭 명심하라 하셨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열심히 무릎을 꿇었다. '하루는 새벽기도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새벽기도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교회에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기도합시다" 혹은 "기도해보고 말씀드릴께요" 하면서 기도생활에 힘썼고 교우들에게도 기도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일들이 원만하게 해결되고 교회도 성장하여 갔다. 무엇보다 평신도 동력자를 붙혀주신 것이다. 다름이 아닌 대전신학교를 졸업한 이우영 집사님이었다. 이 집사님은 교회 창립멤버인 이해천장로님의 아들이었는데 필자보다도 먼저 신학공부를 하였음에도 자신은 성격상 목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신도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하였다. 필자는 이 집사님과 교회 현안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누며 함께 교회를 섬겼다. 이 집사님의 동력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햇병아리 목사 같던 필자는 부임한 그 이듬해 목사안수를 받았고 위임도 하였다. 그리고 지속적인 기도생활과 성경공부반 운영, 전도활동 등을 통해 시무 5년만에 교회가 배나 성장하였다. 당시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였으면 나를 잘 아는 후배 목사가 주변 목회자들에게 "요즘 '상진이 형 전차에 받친 것 같아. 교회 밖에 몰라. 교인 늘이는데 미쳤어'라고 까지 하였다"고 다른 목회자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런던 중 교회에 위기가 찾아왔다. 1994년 정부는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꾸게 된다. 소위 '석탄합리화 사업'이라는 것인데 이 사업이란 석탄 생산은 줄이고 석유 사용과 원전을 통한 전기 생산을 늘이는 사업이다. 석탄 생산은 한계가 있고, 생산비가 많이 들며,  석유 사용이나 전기 사용보다 불편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결과 3~4년 사이에 태백에 있던 광산 40여 개가 5~6개만 남고 모두 폐광되었다. 따라서 인구 약 13만명이 8만명으로 감소되었다.(현재는 4만7천명) 물론 인구감소에 따른 교인들도 감소되었다. 더욱이 떠나는 교우들은 대부분 젊은 교우들이고 남는 교우들은 노동력이 없는 직업병에 걸린 환자나 노인들, 그리고 태백에 살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분들이었다.

나는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훗날 태백도 일본의 한 광산도시처럼 폐허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20일간 금식까지 하며 기도에 힘썼다. 그러면서 '나도 임지를 옮겨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한데 하나님은 빌립보서 2장 5~11절의 말씀을 주시면서 무릎 꿇는 것은 기도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라는 응답을 주셨다. 그래서 앞으로 지역과 교회의 형편이 어떻게 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은퇴할 때까지 이 광산촌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결단하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목회생활이 이제 30여 년이 되었다. 그사이 필자의 아들도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가끔 "아빠, 이런 일이 있는데 아빠는 어떻게 했어? 어떻게 해야 해?"하고 물을 때가 있다. 그때 나도 이렇게 말한다. "명심해. 목회는 무릎으로 하는거야"라고.

이상진 목사 / 황지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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