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을 벗어나 바른 설교로

[ 특집 ] 8월 특집-표절에서 인용으로

정장복 명예총장
2015년 08월 26일(수) 13:54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전수는 모두가 복사와 인용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의 단어나 문장도 내 자신이 창작하여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두가 듣고 보는 것을 그대로 복사하고 인용하면서 구사하는 것이 우리의 언어생태이며 지식의 나열이다. 인간의 지적인 성장이란 이러한 복사와 인용의 기능이 남달리 넓고 빠를 때 발전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이러한 복사와 인용의 효능은 유아기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며 노년이 되어서도 개인적인 발전에 매우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복사와 인용이 공적인 무대 위에서는 엄격한 주목을 받는다. 남이 발표한 글이나 설교를 자신의 것인양 사용했을 때는 엄격한 심판을 받는다. 예를 들면 소설가 지망생들의 세계이다. 소설가로서의 통찰력과 이야기의 전개 그리고 특색있는 문장의 표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남의 소설을 수 백권을 읽으면서 소설의 세계를 익혀야 한다고 교육을 시킨다. 그런데 자신이 펴낸 소설에 한 문장이라도 자신이 읽은 남의소설에서 그대로 복사를 하면 가차 없이 표절의 범죄자로 몰리고 심지어는 형사범으로 고발을 당한다.
 
우리 설교인들의 세계 역시 동일한 범주 안에 머물고 있다. 내가 감동받은 남의 설교를 고스란히 가져와 내 것인양 외칠 때 그것은 분명히 표절이다. 인터넷 문화에서 이러한 행위는 쉽게 발각된다. 그 때 그 설교인은 비록 형사고발 사태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교인들은 그 설교에 심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함정을 벗어날 길은 없는가?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표절의 함정에 쉽게 빠진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주일 낮과 밤 수요일과 금요일의 기도회 그리고 매일의 새벽기도회에서 외쳐야 하는 설교부담이 한계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교회 목사들의 깊은 고뇌가 있다. 그 탈출구가 바로 남의 설교를 표절 또는 복사하고 싶은 유혹이다. 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인용이라는 대안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설교는 인용으로 대체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새로운 설교의 창작이 설교의 바른 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용이 표절보다는 막중한 설교사역을 감당하는데 차선의 방편이기에 유효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요구한다.
 
여기에 표절과 인용의 차이점을 먼저 알아야한다. 표절은 남의 설교를 자기 것인 양 복사하여 단에 서는 도용 행위이다. 이 행위는 설교가 생명력 있는 만나로서 회중들의 영의 양식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 능력과 기능을 마비시키는 독소로 설교자를 침몰시킨다. 거기에 반하여 적절한 인용은 자신이 창작하는 설교의 깊이를 보다 더 풍요롭고 활기차게 하는 중요한 자료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용이 설교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자신의 주관적인 설교구성이 침해 받을 때는 이것 또한 표절의 행위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함으로 인용 역시 설교자의 대단한 주의를 요하게 된다.
 
여기 우리 한국교회 설교인들이 표절을 벗어날 수 있는 몇 가지의 '바른 설교인의 길'을 제시해 본다.
 
먼저는, 남의 설교를 읽고 그 내용이 좋아 그 본문을 자신의 설교 본문으로 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인용하는 폭이 도를 넘을 때 대부분 표절의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된다.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읽은 설교의 핵심적인 전개와 핵심(keyword)과 감동적인 표현들을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그것을 자신의 사고와 언어로 표현하는 길이다.
 
둘째로, 그러나 설교를 작성하면서 자신이 인용하고자 하는 남의 설교를 앞에 두고 즉석에서 참고하는 경우는 표절의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다. 대부분의 경우 지금 내 앞에 놓인 남의 설교는 선악과로 등장하게 되며 양심을 잠재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셋째는, 평소에 스펄젼과 같은 설교의 거성들이 남긴 명설교를 끊임없이 읽으면서 감동이되는 부분을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는 내 설교노트에 적어둔다. 특별히 영력이 넘치는 표현들을 비롯하여 그들이 인용한 자료들을 가져오도록 한다. 이 때마다 그 자료의 출처를 메모하여 표절의 오해를 차단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넷째는, 설교의 인용구는 논문작성처럼 할 수 없다. 몇 줄이고 이어질 수 없다. 두세 줄 이내에서 인용이 있어야 한다. 그 때 설교나 자료의 저자 이름과 책명 정도는 좋으나 굳이 페이지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한 설교만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인용하는 것보다 여러 편의 설교에서 자신이 정한 주제에 부합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섯째는, 인용하는 과정에서 양심이 거부하는 행위는 철저히 단절해야 한다. 설교자의 양심은 도덕적인 기준을 측정하는 기능 외에 성령님이 거하시고 성령님과의 소통이 이룩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어떤 경우도 본문이 정해지면 본문을 앞에 두고 성경학도의 자세로 원어분석을 비롯하여 석의와 강해에 심혈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선포와 해석과 적용을 차질없도록 해야 한다. 그 적용은 내가 섬기는 양들이 직면한 현장과 직결되어야 함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속삭여 보여주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곱째는, 설교의 인용보다 더 편리하고 유익한 설교의 자료는 설교를 생업으로 삼고 사는 설교인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이다. 순간마다 설교자에게는 설교의 영상이 떠오른다. 그 때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메모하는 생활습관은 설교자에게 어떤 설교의 인용보다 훌륭한 설교자료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기도할 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 전체에서 교통하시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최근에 인터넷에서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설교장사'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설교를 짜깁기하여 돈을 받고 설교를 보내주고 있다.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유혹에 빠지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영력 있는 설교자로 남기 위해서는 외면해야 할 함정이다.
 
우리의 한국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현실이다. 이 어려움을 뚫고 다시 일어설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해석되고 효율적으로 적용될 때만이 가능하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교회는 슬픈 종말을 맞게 된다. 여기에 설교사역이 가장 근간이 되어 견인차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지금 한국인의 지적수준은 예전과 다르다. 지성적 기능의 향상과 인터넷 문화의 첨단에 서 있는 회중들은 설교사역에 지극히 비판적이다. 정직한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의 설교자들 앞에는 머리를 숙이고 그렇지 못한 설교자들은 경멸한다.
 
이러한 환경에 서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미소 짓고 그 백성들이 행복해 하는 설교를 위하여 우리의 삶을 소진시켜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설교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참 선지자인지 아니면 거짓선지자인지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그 분별은 다음의 말씀을 반복하여 읽을 때 분명해진다.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렘 14:14)

정장복
한일장신대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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