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8월 10~15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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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04일(화) 16:35

월-물결에 진 치고
본문 : 출 15:27
찬송 : 545장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넌 후, 구름기둥은 그들을 북쪽 가나안을 향하는 직행로로 가지 않고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래로 향해 수르광야에서 마라로 인도한다.
 
마라의 쓴물 가운데 한 나무가 던져지므로 단물로 변한다(출 15:25). 마라에서의 이스라엘의 경험은 십자가 체험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죄의 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과 이방의 어두움 가운데서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자기의 죄로 저주받고 고난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던져지셨다.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을 경험한 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견디기 어려운 상황 안으로 데려가시기도 한다.
 
마라에는 치료하는 나무는 있으나 생명의 풍성함과 승리를 위한 칠십 종려나무는 없다. 밑으로 향하는 길에도 구름기둥을 따른다면 결국은 엘림에 도착할 것이다. 거기에는 물샘 열둘이 흘러넘치고 있었으며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치솟아 자라고 있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출 15:27). 이 풍성함은 십자가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결과임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생생한 샘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어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임하셔서 충만케 하시는 분이다. 이어 그 백성들이 엘림에 이르러 '물 곁에 진을 친 것'을 본다.
 
진을 쳤다는 말은 하나님의 군대로 편성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백성이 스스로 싸우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셔서 바로와 그의 병거들을 홍해 물에서 패배시키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홍해를 건너 마라에서의 십자가와 엘림의 성령의 풍성함을 경험한 후에야 하나님의 군대로 서게 된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싸울 자격을 갖추게 된다.
 
싸우기 위해서는 쓴 나물과 유월절 어린양과 무교병을 먹는 것만이 아닌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해야 한다. 마라를 통과하여 엘림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군대로 서려면 먼저 물샘 열둘의 흐름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의 성령 안에서 흐르는 생명과 자라는 생명이 필요하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오시며 역사한다. 
 
그것이 성령 충만함을 경험한 마가다락방의 성도들에게 생수를 흘러내는 샘이 되었다. 이제 우리 교회공동체가 엘림의 물 곁에 진치고 열두 샘과 칠십 종려나무를 누리며 당당한 하나님의 군대로 지금도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엘림으로 인도하시어 열두 샘물을 준비하시며 풍성한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믿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봉재 목사
연곡소망교회

화-복되고 거룩한 날
본문 : 출 20:8~11
찬송 : 44장

생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 있다. 직장 때문에, 아니면 급한 사정이 생겨서 주일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상황들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도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울 때가 많다. 참으로 보석과 같은 빛난 믿음들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에 제4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계신다. 이 안식일 계명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첫째로 복되게 하신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이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복된 날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면 어떤 복을 주시는가? 먼저, 안식의 복을 주신다.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 육신의 안식을 취하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육신의 안식이 필요하다. 육신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몸이 힘들면 피곤하고 지치면 병들기 쉽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이 땅에 영적인 의사로 오셔서 죄뿐만 아니라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치료해 주셨다.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종종 진단을 내리기를 조금만 쉬면 괜찮다고 하면서 과로하지 말라고 한다. 쉬는 것이 건강 회복의 비결이고 효과적인 삶을 사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안식을 위해서 주일날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동행하는 영적인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거룩한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룩이란 원어 뜻은 '성별하다, 봉헌하다'이다. 거룩하게 여기란 말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만 쓰임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중에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실 만큼 예배를 기뻐하신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서로 친밀한 교제와 사랑을 나누는 것과 선을 베풀고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삶이 또한 예배의 삶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주일은 영적인 부활이 있는 날이다. 토요 안식일은 예수님이 무덤에 안장되어 있었고 주일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이다. 주일은 주님과 함께 영적으로 연합된 우리가 새롭게 부활하는 날이다. 끊임없이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내 육신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성령 충만하여 영적 부활로 새롭게 되는 날이 바로 주일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강건하게 세워진 믿음의 반석같은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만호 목사
이루리교회

수-사랑은 여기 있으니
본문 : 요일 4:7~11
찬송 : 143장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 국왕의 자리를 포기했다. 그 여인은 2번의 이혼 상처가 있는 윌리스 심슨이었다. 왕위까지 포기하는 사랑.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와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사랑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않는, 끝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생명을 주는 사랑이다.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이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전에는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과격한 성격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후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요한은 강조하고 강조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다.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으셨고, 우리가 달려 죽어야 할 그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 그 사랑은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져 아무리 발버둥쳐도 피할 수 없는 넘치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에 부딪혀야 한다. 그 사랑을 경험할 때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둘째, 이웃에게도 이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다. '마땅하다'의 헬라어 '오민'이라는 단어는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분명히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의무이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가 행해야 할 것은 사랑을 위한 수고이다. 하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35)." 주고 또 주는 아가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수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열심히 사랑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셋째,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프로포즈이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그 사랑이 나를 구원했다. 주님의 그 손을 한 번 잡아 보자. 주님의 그 품에 안겨보자. 주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닮아가는 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재학 목사
온유교회

목-하나님의 일을 이루려면
본문 : 마 26:47~56
찬송 : 425장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어 감람산에서 가롯 유다를 앞세운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게 체포되신다.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아 당황한 베드로는 그 무리들로부터 예수님을 구해 보려고 가지고 있던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친다.
 
그 사태를 지켜보던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 그러시며 "나도 천사들을 명하여 이 무리들을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는가?"라고 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매일 주기도문으로 기도한다. 하지만 삶으로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자신의 힘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 칼의 힘을 통해 주의 일을 하려고 한다. 자신의 계획 경험 능력이면 주의 일이 다 될 줄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신의 판단을 앞세워 주의 일을 하려고 한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베드로는 '주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어보지 않았다. 주님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묻지 않는다. 주님께 물어만 봐도 지금보다 훨씬 더 주님의 뜻에 맞는 신앙생활 할 수 있다. 하지만 묻지 않고 살아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목으로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점점 멀어져 간다.
 
셋째, 고난도 희생도 없이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한다.
 
베드로 자신은 죽지 않고 희생하지 않고 주의 일을 하려한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데는 우리 자신의 고난 희생이 반드시 지불돼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주님의 뜻이 살아 날 수 있는가? 나의 어떤 희생으로 주님의 뜻이 살아 날 수 있는가? 때론 자신의 뜻도 생각도 포기하고 손해도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주님의 뜻과 일이 이루어진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는가?
 
먼저, 하나님의 하시려고 하는 일이, 뜻이 무엇인지 정학히 파악하셨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피땀 흘리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신다.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신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하신다.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셨고 십자가도 순종하셨고 죽음도 순종하심으로 받아들인다. 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바로 섬기고 있는지 베드로처럼 엉뚱하게 칼을 휘두르며 남에게 상처나 고통만 주지 않는가를 돌아보아야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을 닮아가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드리며 믿음생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광열 목사
무안교회

금-지옥은 어떤 곳인가?
본문 : 계 21:5~8
찬송 : 235장

미얀마의 승려 파울로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났다. 죽은 상태로 3일 동안 있었기 때문에 관 속 시신이 부패하여 송장물이 흥건히 흘렀다. 그런데 화장을 위하여 시신을 불에 넣으려고 하는데 관에서 시체가 벌떡 일어난 것이다. 그가 죽어 관 속에 있던 3일 동안 환상을 보았는데, 강한 폭풍이 불어오더니 모든 나무가 다 쓰러졌다. 그 후에 강 건너편에서 무시무시한 지옥불을 보았다.
 
그가 지옥의 사자를 보았는데, 얼굴은 사자, 발은 뱀, 머리에는 뿔이 있었다. 지옥의 사자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나는 지옥의 왕 파괴자다"라고 하면서 지옥을 보라고 말했단다. 지옥을 들여다보니 사얀다우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미얀마에서 가장 존경 받던 승려로서 교통사고를 당하여 사망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파울로는 "훌륭한 분이 왜 지옥에 와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좋은 선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길로 가다가 빛이 환하게 비치는 좁고 험한 길을 만났다. 거기서 베드로를 만났는데, 파괴자는 "더 이상은 못간다"고 막더니, "예수님 믿고 오면 천국으로 가고, 안 믿고 오면 지옥으로 간다. 네가 지금까지 본 것을 세상에 가서 전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파울로가 살아난 후 미얀마에서 천국과 지옥을 전하다가 많은 핍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후로는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사탄의 최고 전략이 무엇인가?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 지옥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영적세계의 구성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천사, 귀신, 천국과 지옥이 그렇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말씀을 전파했데 지옥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사명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지옥을 왜 만드셨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귀신들을 벌주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가?
 
하나님 말씀보다 마귀의 거짓말을 더 믿고 따르기에 지옥에 간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라고 말했다. 누가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는 말씀인가? 예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고 교회생활에 최선을 다 하자. 최고의 복을 받은 자가 누구일까? 영원한 나라 천국을 잘 준비하고 사는 사람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세상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우리가 다가갈 때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재운 목사
인동동부교회

토-칠전팔기의 신앙
본문 : 잠 24:13~20
찬송 : 543장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처를 가지고 아파하며 살아간다. 상처 없는 인생은 없다. 다만 포장하고 살아가는 것 뿐이다. 때론 그 상처 때문에 절망하고 포기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처난 우리 마음을 만져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신다.


엘리야가 심히 낙심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기도했을 때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듯이 오늘 상처받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다시 일어날 것을 명령하신다. 칠전팔기란 말이 성경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의인은 재앙으로 수없이 넘어져도 그 재앙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가 의인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의인이라 하신다. 의인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산다. 삶의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악인은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둔다. 재물, 권력, 학벌이 있으면 가치 있는 삶을 산다고 한다. 또 세상의 많은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자식, 건강, 권력, 자기 힘, 학력, 머리 등을 의지하고 산다. 세상의 성공을 의지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의인들은 이런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 다윗은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고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다(시 31:12)고 말한 처지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났다. 요셉은 종살이, 감옥생활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어섰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그의 친구들은 풀무 불에서 살아났다. 베드로는 넘어진 후 다시 일어나 사도로 감당했다. 하나님의 약속 붙들고 일어나라.

 
하나님은 당신이 넘어짐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약속 붙들고, 십자가 붙들고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진정한 성공자는 넘어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약속 붙들고 일어나는 사람이다. 반대로 실패자란 다시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도달하지 못한 것이 실패가 아니라 일어서지 않는 것이 실패이다.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 이것이 의인과 악인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탄은 언제나 끝났다고 참소한다. 그러나 넘어짐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오늘 넘어졌는가? 실패했는가? 하나님의 음성 듣고 다시 일어나자.

오늘의 기도
 
다시금 어그러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며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도숙 목사
동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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