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 27일~8월 1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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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23일(목) 10:19

월-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예수님
본문 : 눅 7:11~17
찬송 : 96장

남편과 사별하고 한부모가정이 된 여성이 외아들마저 잃고 슬퍼하고 있다. 아이와 여성은 계수도 되지 않던 당시 문화에서 남편이 없다는 것은 곧 최하위층으로 몰락한다는 의미이다. 여인에게 힘든 삶을 이겨낼 한 가지 희망은 외아들이었다. 아들이 잘 성장하여 사회의 일원이 되고 가정을 꾸리며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망으로 역경을 견뎠다. 고달픈 인생에서 아들이 장성해 가는 걸 지켜보는 것이 기쁨이었고, 삶의 이유였다. 그 아들이 이제 청년이 되었고, 어머니의 꿈이 이뤄질 날도 멀지 않았다. 근데 꿈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꿈을 상실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셨다. 가버나움에서 말씀으로 원격 조정하듯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하신 사건은 핫뉴스다. 이 소문을 듣지 못했다하더라도 성문 근처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고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매달릴 법도한데, 이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하룻길(약 40km)을 걸어서 찾아오셨다. 소망을 잃은 자기 백성들을 돌보기 위해 찾아와주셨다.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공감하셨다. 13절의 '불쌍히 여기사'의 원어를 보면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의미 한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을 뼈 속 깊이 공감하시고 '울지 말라' 위로하며 다가와 함께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자신을 하염없이 눈물로 바라보고 있을 마리아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여인의 희망을 되찾아주셨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손을 대며 명령하신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손을 대는 것 자체로도 부정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잃어버린 소망을 되찾아주시기 위해서 친히 부정한 것에 손을 대며 "청년아 일어나라!" 명령하신다. 과부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첫 기적을 행하셨다. 나인 성의 뜻은 '즐거움'이다.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 여인의 즐거움을 되찾아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자신의 백성들을 되찾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공감하시며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주신다.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나인 성에는 두 행렬이 있었다.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생명의 행렬과 나인 성에서 나오는 죽음의 행렬이다. 조용하지만 소망과 생명의 빛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과 울음꾼들이 떠들썩하게 통곡하는 절망의 행렬이 있었다. 여러분은 어느 행렬 속에 있는가? 날마다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생명의 행렬, 기쁨의 행렬에 거하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며,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생명의 행렬 속에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영 목사
이주민센터 라함 대표

화-가야 할 곳도 모른채
본문 : 히 11:8
찬송 : 430장

이스라엘의 군사전문가들이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한 부대를 두 팀으로 나눈 후 행군을 하게 했는데 한 팀에는 목적지와 가는 길, 소요시간을 브리핑하였고, 다른 한 팀에는 정보 없이 오직 명령만 따르게 했다. 정보를 들은 팀은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지만, 명령만 따라간 팀은 40%나 낙오했다. 사람들이 분명한 목적을 알고 행동할 때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길을 떠났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이라 하였고 그곳이 어딘지 말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 데라가 그를 인도했다. 데라가 정한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지만 하란에서 그만 세상을 떠났다. 가나안까지 아브라함은 다시 여행을 시작했고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도착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일들은 두 가지 시각으로 읽어진다. 그 중 하나의 시각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특별히 해주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후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오니 그 때서야 "여기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은 항상 일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셨고 아버지 데라의 마음을 움직여 가나안을 목적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하셨다. 데라가 죽었어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붙드시고 계속 여행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다. 출발부터 도착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들로 가득하다.
 
어떻게 똑같은 역사인데 두 가지 반대의 시각으로 나눠지는 것일까? 그것은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해도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가 믿음으로 바라본 것은 목적지가 아닌 매일 그와 함께 계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매일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매일 말씀을 갖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한 걸음씩 순종하면서 따라가는 것만이 믿음을 얻는 길이다.
 
오늘의 기도
 
저희에게 믿음을 주셔서 가야할 곳을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며 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인돈 목사
아름다운교회

수-은혜를 소중히
본문 : 고후 6:1~2
찬송 : 223장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첫째, 싸구려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이나 공기와 같다. 그래서 싸구려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저 주시다 보니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은혜를 거져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도무지 그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한다. 금이나 보석이 귀한 줄은 알아도 공기나 물이 귀한 줄은 잘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금이나 보석 없이는 살아도 공기나 물이 없으면 살지를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둘째, 은혜를 자기 공로화 하는 것이다. 은혜는 내가 쟁취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고 나는 거저 받은 것이다. 그런데 남의 물건을 오래 빌려 쓰다보면 원래 내 것인양 착각하기 쉽다. 다시 돌려달라고 하면 화를 낸다. 다른 사람이 더 큰 은혜를 받으면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마치 자신의 자신의 의와 공로로 그렇게 된 것처럼 갑질을 한다. 겸손이 사라져버린다. 이것은 은혜의 공로화이다. 은혜를 헛되이 만드는 것이다.
 
셋째, 은혜 받을 때를 미루는 것이다. 지금 안 받아도 되니 다음에 받겠다고 미루는 것, 헛되이 받는 것이다. 2절을 보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구원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구원받을 만한 때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정작 본인은 "지금은 아니다, 다음에 하면 된다"라고 우기는 것이다. 만사에 때가 있다. 그 때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판단하신다. 우리가 받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가 시간이라는 은혜이다. 구원을 받을 때를 놓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방주의 문이 닫히면 방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시간이 있고, 기다려주시는 시간이 있고, 열려 있는 시간이 있다. 때를 주실 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잘 활용하는 것이 은혜를 소중히 받는 모습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오늘의 기도
 
은혜로 산다고 하면서도 내 의와 공로와 지혜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남정우 목사
하늘담은교회

목-가정의 위기 극복 방법
본문 : 창 35:1~15
찬송 : 558장

믿음의 조상 야곱이 가정의 위기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극복했는가를 보면 오늘 우리들의 가정위기 극복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야곱은 세겜에서 딸 디나의 강간당한 사건과, 자식들이 세겜인들을 살륙한 끔찍한 범죄로 인하여 세겜인들에게 보복을 당할 곤경(위협)에 처했다.
 
이때 야곱은 첫째, 자기의 잘못임을 깨달았다(회개). 둘째, 가정의 이방신상을 버렸다(신앙개혁). 셋째, 가속들을 모두 정결케 하였다(의롭게 됨). 넷째, 의복을 바꾸어 입었다(삶의 변화). 다섯째, 실행에 옮겨 벧엘로 올라갔다(순종). 그리고 여섯째, 벧엘에 올라가자마자 제단을 쌓았다. 이는 영적 회복, 곧 예배 회복을 말한다. 야곱은 30여년 만에 벧엘로 돌아와서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엘 벧엘'이라 하였다. '하나님,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므로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이요, 진실한 여호와 경외 신앙의 고백이며, 야곱 자신의 영적 지위의 회복이며, 가족 공동체의 신앙 회복과 부흥이며, 세겜(세상)으로의 회귀를 엄격히 금한 결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희생의 헌신을 하겠다는 결단의 의지인 것이다. 이런 야곱의 예배신앙이 가정을 건강하게 새우고 새로운 축복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야곱의 모든 행동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께 단을 쌓는데 있는 것과 같이 성도의 삶은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영광 돌리는 삶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면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특히 자녀들의 신앙과 예배의 삶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복이 임하기 때문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사 과거에 주셨던 언약을 재 확증하시고 복을 주셨다.
 
첫 번째 복은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야곱을(발꿈치를 잡은 자, 움켜쥐는 자, 거짓말쟁이) 이스라엘로(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승리자)바꿔주셨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인생이 바뀐 것을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 큰 민족의 조상이 된다고 약속하신다. 또한 "네 후손 중에서 왕들이 나오리라"고 하셨다. 야곱의 혈통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다윗과 솔로몬 같은 위대한 왕들이 나왔다. 영적으로는 만왕의 왕이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을 너와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하셨다.
 
야곱이 벧엘에 올라와 제단을 쌓으므로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모든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가정마다 예배가 회복하므로 영성이 살아있게 하시고 가정에 약속하신 복을 누리며 건강한 가정을 세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태현 목사
광양교회

금-나 죽어 너 살자
본문 : 마 26:47~56
찬송 : 143장

사람은 누구나 살기 위해서 노력한다. 살기 위해서 돈을 벌고 살기 위해서 공부도 한다. 심지어 '너 죽고 나 살자'는 사람도 많다. 나라야 망하든지 말든지 나만 살자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사람도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여기 '나 죽어서 너 살자'고 하면서 죽기 위해서 사신 분이 계신다.


첫째, 우리는 살기 위해서 밥을 먹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고 생명수가 되어 주셨다. 잡히시기 몇 시간을 앞두고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을 들어 축사하신 후 나누어 주시면서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식후에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면서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한 나의 약속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식사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로 예수님 죽어서 우리를 살리시는 영생의 양식이 되시고 생수가 되셨다.
 
둘째, 우리는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기도하셨다. 식사를 마치시고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이동하셨고 기도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는 달랐다. 우리는 내 뜻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셨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기도하셨다. 예수님 당신이 죽어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말이다.
 
셋째, 우리는 살기 위해서 잡혀 살지 않으려고 싸우는데 예수님은 잡히시기 위해서 힘쓰셨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려하자 베드로가 칼을 빼서 휘둘러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잘랐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칼을 칼집에 도로 넣으라"고 막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올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셨다. 우리는 잡히지 않으려고 칼을 빼드는데 예수님은 잡히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칼을 빼든 베드로를 막으셨다. 나 죽어 너 살자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하늘 영광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죽기 위해서 달려가셨으며, 마지막에 죽기 위해서 떡을 나누어 주셨고, 죽기 위해서 기도하셨으며, 죽기 위해서 베드로를 막아서셨고, 천사를 불러오지 않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숨을 거두시고 우리 인간을 지옥 불에서 건져내시는 일을 다 이루셨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죽어 지옥 갈 나를 살리셨으니 바울 사도처럼 나 죽어 주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복 목사
천광교회

토-겨자씨 예수님 교회
본문 : 마 13:31~32
찬송 : 93장

생명력 있는 교회란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교회를 말한다. 생명에는 능력이 있다. 생명력 있는 교회로 인하여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교회에 대한 꿈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큰 교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영혼들이 깃들 수 있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진정 큰 교회이다. 오늘 본문은 천국비유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여기서 '천국'은 지상에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겨자씨는 생명의 인자이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겨자씨와 같은 분이시고 교회의 주인이시다.
 
1.겨자씨 예수님을 심는 교회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했다. 겨자씨는 약 725~760개가 겨우 1g 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마치 겨자씨같이 작으신 예수님! 그 작은 겨자씨가 파종된 '자기 밭'은 하나님의 교회이다. 한 알의 겨자씨처럼, 주인의 손에서 밭고랑 속으로 던져졌다. 흙속에 파묻혀 버린 겨자씨의 모양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겨자씨 예수님은 생명이었다. 생명은 생명을 낳는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생명을 심는 일을 계속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2.겨자씨 예수님이 커지는 교회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라고 했다. 그 작은 크기에 비해 성장은 실로 대단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겨자씨의 성장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이 세운 교회에서 30배, 60배, 100배로 예수님이 커지는 것을 말한다.
 
3.겨자씨 예수님께 깃들이는 교회
 
다시 말하기를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하였다. 깃들다는 원어로 '카타스케노오'인데 '아래서'라는 전치사 '카타'와 '스케노오'라는 '천막을 치다, 거하다'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곧 안전한 거처를 마련한다는 뜻이다.
 
오늘 교회를 천국으로 비유하고 있다고 볼 때 그 겨자씨 나뭇가지에 깃드는 새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예수님 안에서 삶의 보금자리에 정착하고, 구원의 행복을 만끽하고 살아가는 교회 안의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커질대로 커진 교회 안에서 우리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오늘의 기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커지셔서 온갖 사람들이 깃드는 영혼의 쉼터가 되는 교회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성수 목사
산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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