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위한 치열한 의지와 희망, 그리고 교회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2015년 07월 06일(월) 18:03

<산다> 감독 : 박정범, 드라마,청소년관람불가, 2014

너무 사실적이어서 놀랐고, 너무 공감적이어서 고통스러웠으며, 너무 현실적이어서 충격적이면서 또한 내심 답답했다. '무산일기'(2010)를 통해 알게 된 감독의 영화다보니, 영화보기를 선택할 때부터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각오했다. 실제로 접하니 그 무게감이 이전 작품 보다 훨씬 컸다. '대체 이 영화는 누가 보아야 하는 걸까?'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질문이다. 약육강식의 잔혹한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영화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보고 또 성찰해보라는 의미에서 추천해서 그들이 감상한다면, 혹시 그들의 억눌린 정서는 정화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보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자본가와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강제라도 볼 수 있게 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쉽다. '설국열차'가 묘사하고 있듯이, 생존을 위해 삶의 열차 막 칸에 올라타 언제라도 떨어질지 몰라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들은 보아야 하고, 그래서 무엇을 해야 이들의 삶의 무게가 덜어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고민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나 정치가들이 보기에는 너무 불편한 영화라 생각되고 그래서 외면당할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추운 겨울날 정철(박정범)이 홍수로 무너진 황량한 집터를 혼자 힘겹게 일구는 첫 장면은 영화 전체 내용을 압축한다. 무엇보다 홍수처럼 그의 행동이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닥친 사건들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면서, 또한 헝클어진 덤불을 제거하며, 나무를 베어 나르고, 무거운 돌을 옮겨놓고, 무너진 천장을 세우는 장면은 정철이 감당해야 하는 짐의 무게가 어떠한지를 암시한다. 내용은 비록 정철이라는 한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사실 이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짐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족과 일터를 포함한 모든 사회관계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겪는 무게는 얼마나 큰가. 오늘날 한국 사회같이 서민들이 정치인들의 정책 실패로, 회사 운영자의 운영실패로, 구조적인 문제로 그리고 누군가의 탐욕 때문에 일어난 결과를 그들이 아닌 자신의 짐으로 여기며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그런데 영화는 결코 한 사람의 삶의 무게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정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도 주의 깊게 보면 그렇지 않은 장면들을 발견한다. 다름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가족과 일터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면서 그 짐을 떨쳐버리려 안간힘을 썼던 정철 역시 가족과 일터에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의 짐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결국 자신의 짐을 덜거나 누군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짐을 더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낮에는 중장비 기사로, 밤에는 관광버스의 취객을 상대로 돈을 벌며 사는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왜 난 하나도 가질 수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정철의 취중 외침은 자신의 짐을 덜기 위한 노력에서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도대체 이런 척박하고 잔인한 환경에서 산다는 것, 아니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결코 시원스레 답할 수 없는 이 질문을 두고 감독은 오랫동안 씨름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영화에서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 있는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모습들에 그토록 긴 시간을 할애한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결코 대답 없이 남겨놓을 수 없는 질문인 까닭에 감독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 질문에 대답을 한다. 의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집을 나간 누나가 돌아올 수 있도록 어두운 거리를 밝혀줄 가로등을 달아주고, 일꾼들의 임금을 들고 서울로 달아난 것에 화가 나 떼어갔던 집의 철문을 달아주는 장면이다. 가로등과 최소한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추위를 막을 수 있게 해주는 문은 희망의 사인이다. 감독은 무겁다고 여겨져 삶의 짐을 벗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더욱 큰 짐을 지게 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에선 자신의 짐을 덜기 위한 노력보다 오히려 서로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할 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무산일기'에서와 같이 이 영화에서도 교회는 불편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교회는 어린 조카가 무료로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곳이면서, 또한 그녀가 아픈 엄마를 위해 기도하는 곳이다. 정철에게는 그나마 아이의 미래를 맡길 수 있다고 여기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보내려고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교회는 그저 깨끗함만을 강조할 뿐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일에도 깨끗한 마음을 위해 손이 깨끗해야 한다고 말하고,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범한 잘못은 마땅히 회개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도 장발장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빵을 훔쳐야 하는 상황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들어야 할 사람들 앞에선 침묵되고 오히려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오직 그 목적을 위해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깨끗함을 외친다면, 교회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했다. 교회는 등과 빛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주의 말씀이 살아있음을 나타내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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