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질병에 대한 관점 재정립해야

[ 특집 ] 7월 특집-메르스 그 후

이왕재 교수
2015년 07월 02일(목) 10:21

온 나라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때문에 난리를 치르고 있다. 신종 전염병이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하지만 변종 감기에 불과한 질환에 대해서 너무 과잉 대응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과잉대응의 피해가 국가적으로 너무 크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이 신종 전염병에 대한 대응이 일반 단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이러한 전염병의 창궐을 계기로 먼저 하나님을 믿은 자 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질병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사람이라면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 살면서 한번쯤은 질병과 조우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의학적으로 매우 심각한 질병에 이환이 되어서 긴 세월을 고통 가운데 보내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평생을 살면서 감기 정도의 가벼운 질병만을 경험하고 생을 마감하는 축복에 가까운 삶을 살다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인간이라면 한 번 쯤은 반드시 질병으로 인해 고생을 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질병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대응방법이 천태만상이라는 데 흥미로움이 있다. 즉시 병원으로 가서 의료인과 상의하는 사람도 있고 가까운 약국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혹자는 동종의 질병이환 경험이 있는 사람의 말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이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 좀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귀가 얇아서 질병에 대한 치료방안을 생각할 때 정통의 길을 택하기보다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퍼뜨려진 한 번의 경험에 의한 부분적인 이야기에 더 비중을 두려는 경향이 매우 큰 것 같다. 그 방법의 합리성이나 과학성을 따지기에 앞서서 치료된 결과만을 강조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방법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만드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필자는 의료인이요, 독실하고자 하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기독교인의 신앙적 질병관에 매우 관심이 많다.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질병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경우에는 비기독교인보다도 더 맹목적인 때가 있는 것을 보고 아연해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는 기독교인에게 온 질병이 갖는 의미는 비기독교인들이 얻은 질병이 갖는 의미와는 여러모로 다르다고 생각된다. 비기독교인에게 질병은 단지 고통이요,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라면 기독교인에게는 투병 그 자체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투병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고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함께 기도함으로 더욱 뜨거운 신앙의 세계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기간 동안에 보여 주셨던 신유의 은사들을 보면 적지 않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노라"는 식인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 마음속에 진정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그로 인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병 나음을 얻은 여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즉 예수님께서 그 신유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며 또한 그분께서는 그것을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결코 질병을 해결하는 예수님의 능력과 치료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는, 환언하면 기도하기만 하면 모든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뜻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이 육체의 질병을 위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족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고 그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있을 때, 즉 우리가 약할 때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도할 수 있으니 우리의 약함이 곧 강함이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질병의 의미는 일차적으로는 모든 인간에게 그러하듯이 고통일 수밖에 없지만 신앙적으로는 이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우치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질병의 의미가 이렇게 규정되어질 때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은 기도만 하면서 하나님의 뜻만 깨우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적이냐 하는 사실일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신앙적 견해를 야고보서 5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피력하고자 한다. 야고보 사도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를 청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 혼자 고민하지 말고 신앙의 동료, 선후배들에게 기도를 의뢰하라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진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의 병을 위해서 기도를 의뢰할 수 있는 신앙의 동료나 선배가 있음은 진정 하나님의 복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다음을 보면, "장로들은 그 환자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천년 전의 사회에서 환자에게 기름 바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의 손을 통한 치료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질병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 때 여기서 특별히 고려하여야 할 사항은 결국, '…기름 바르며'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볼 때 발달된 의술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곰곰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우수한 머리를 선물로 주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우수한 머리를 이용하여 발달시킨 현대의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커다란 복임에 틀림이 없다. 이 의술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어떤 한 기독교인이 병에 걸리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분명한 치료 방침이 과학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현대의학에 의지하지 않고 즉시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만 함으로 병이 나음을 얻었다고 하자. 그 개인으로 볼 때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에 응답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은 요술방망이와 같은 기도만 의지하여 병이 생기기만 하면 기도원으로 달려갈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기도의 응답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요 결국은 다른 방편을 찾아 하나님을 떠나고 말 것이다. 소위 잘못된 기도의 예를 남기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병든 자가 기도원으로만 간다면 현대의학의 발전을 어디에서 기할 수 있을까?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바른 신앙인이라면 기도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삶 중에 질병이라는 문제가 나타났을 때 그 문제 해결을 위한 본인의 기도와 신앙의 동료, 선후배들에게 기도를 청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발달된 현대 의술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발달된 의술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하나님이 지으시고 원하시는 세상은 질서의 세상이지 혼돈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왕재 교수
서울대 의대ㆍ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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