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가로 막는 장벽들… 영화 '바벨'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2015년 06월 29일(월) 17:46

<감독 :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06>

2006년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바벨'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혼란이라는 의미의 '바벨'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이다. 특히 소통의 단절로 인한 혼란에 천착해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혼란의 근원적인 원인을 나름대로 재현하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에서 소통의 단절을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은 더 이상 언어의 차이가 아님을 역설한다.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생명의 위기 앞에서 생명을 돌보는 일은 비록 언어가 달라도 공감적으로 실천될 수 있으며, 아이들은 서로 언어가 틀려도 서로 어우러져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예증으로 제시한다. 소통에서 지역적인 한계는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 만일 언어의 차이도 지역적인 한계도 아니라면 현대 사회에서 소통을 가로막고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감독이 주목하는 현상은 선입견 혹은 편견이다. 영화의 내용은 이것과 관련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입견과 편견이 일상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웃으로부터 구입한 중고 사냥총이 제원과 달리 실제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 낙후된 지역의 물이라 오염되었을 수도 있다는 편견 때문에 제공된 얼음을 버리는 일, 총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는 순간에도 낯선 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치료를 주저하는 일, 모로코에서 일어난 우연한 총기 사고에 불과한 것임에도 피해자가 미국 관광객이고 또 이슬람 지역에서 벌어졌다는 이유로 테러로 규정하는 미국 정부의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외교 태도, 부유한 미국에서 멕시코로 넘어갈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밀입국자일 수도 있다는 편견으로 보는 일, 그리고 일본에서 청각장애인에 대한 편견 등의 장면들이다. 일련의 선입견과 편견의 작용을 보여주는 장면을 매개로 감독은 인류 사회의 일치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혼란을 유발하는 요인은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 때문임을 설득하려 한다.

사실 선입견이나 편견은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거나 관철시키기 위한 방어기제다. 선입견은 낯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이고, 편견은 어떤 판단에서 자신이 옳음을 드러내는 근거로 사용되는 방편이다. 기억에 의존하여 현재와 미래를 평가하는 태도다. 기억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개인 이기주의 혹은 집단 이기주의를 유발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선입견과 편견은 안정된 신뢰관계를 해치는 주범이며, 신뢰관계의 붕괴는 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국가와 국가 사이, 인종과 인종,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기성세대와 자라는 세대, 강자와 약자,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서 확인되는 수많은 혼란은 대체로 선입견과 편견에서 오는 것들이 많다. 이런 점에서 감독이 현대판 바벨(혼란)의 원인을 선입견과 편견에서 보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일별하기만 해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교회의 혼란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혼란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교회의 혼란을 유발하는 각종 문제들은 신앙과 윤리의 실종에서 오지만, 대부분 신뢰관계의 붕괴에서 유래한다. 대형교회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작은 교회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성도가 성도에 대해 갖는 것은 물론이고, 목회자가 성도에 대해, 성도가 목회자에 대해, 목회자가 목회자에 대해 갖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하다. 과거 세상을 향했던 비판의 시선은 이제 교회 내부로 향하고 있다. 선입견과 편견은 교회의 혼란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한편,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만일 선입견과 편견이 완전히 제거되어 신뢰관계가 온전히 구축되면 혼란은 사라질까? 영화는 다만 혼란의 원인을 보여주려고 했을 뿐,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스크린 밖에 위치해 있는 일련의 질문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소통의 단절을 말하면서도 신뢰 회복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입견과 편견이 지역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글로벌한 것이듯이, 신뢰회복을 통해 소통의 재개 역시 인류의 오랜 숙원인 지구촌의 하나됨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영화를 보면서 바벨 자체에 대한 성경적인 생각과 다른 부분을 발견한다. 곧 성경은 어떤 형태의 건축물이든 그것이 인간의 이름을 드러내고 흩어짐을 면할 욕망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혼란으로 이어질 것임을 단언한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라도 그것 때문에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영화는 그 반대를 생각하게 만든다. 선입견과 편견을 제거하면 다시금 하늘에 닿을 만한 탑 건설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숨겨진 욕망이 작용한다.

성경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창조 목적을 저버리고 오직 인간 자신에만 집중하는 욕망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며, 따라서 아무리 첨단의 과학기술이 뒷받침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피할 수 없는 혼란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인간의 이름이 드러나는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가능하지 않으며, 그런 시도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입견과 편견이 인류 사회의 혼란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인 것은 분명하고, 이것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은 옳다. 그렇다고 해서 선입견과 편견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이름을 드러내려 시도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것은 인간 욕망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며 또한 성경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다.

최성수 목사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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