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칼럼 - 정의란 무엇인가?

[ 주필칼럼 ]

이홍정목사
2015년 06월 21일(일) 15:11

정의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롭게 사는 것인가? 한국교회의 정치적 삶에 정의는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는가? 한국에서 유독 유명세를 떨친 마이클 샌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정의에 대한 물음은 동양의 노장시대, 서양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와 그 이후 인간사회에 근본적인 사회 철학적 물음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타락 이후와 예수 시대의 이야기들 속에도, 오늘 흔들리는 한국교회의 정치적 삶 속에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 인간사회가 부정의에 의한 모순과 관계의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네가 누구냐?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네 이웃이 누구냐?  

정의로운 현실의 구현은 과정과 수단의 측면과 결과와 목적의 측면을 포괄하는데, 많은 경우 이 두 측면을 혼동하여 과정을 결과로 수단을 목적으로 인식하므로 문제가 야기된다. 정의를 실현하는데 평등과 비례 같은 배분적 형식의 방법들이나 자유와 행복 같은 가치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과로서의 정의가 그 실현을 위한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과정과 수단에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배분적 정의와 보상적 정의로 구분한다. 배분적 정의는 명예나 재화나 나눌 수 있는 가치의 배분에 적용되는 원칙이며, 보상적 정의는 여러 형태의 상호교섭에 대한 조정의 원칙이다. 여기서 정의는 평등에 집중한다. 배분적 정의의 원칙은 배분의 평등, 즉 비례적 평등이다. 배분이라는 형식에 평등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면 정의가 실현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의는 배분의 형식이나 평등의 등식 같은 과정적 기능, 그 자체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 평등의 과정에 개입되는 인자들의 가치가 지닌 수시 변화의 속성들 때문에, 그들 사이에 항상적 평등관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 한국교회의 정치적 삶 속에는 결과로써의 정의를 왜곡시키는 수많은 암묵적 과정과 정치적 합의의 기제, 즉 배분과 보상의 수단들이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해집단들 간의 합의대로 지켜지는 것을 ‘정의’로 치부한다. 예를 들면, (부)총회장 선거 이후에 이뤄지는 제반 인사정치에 합의된 배분과 보상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애쓰지만, 그것이 정의의 결과는 아니다. 각 지역 인사를 골고루 기용하는 배분과 비례의 정의를 흉내 내지만, 그것이 전국 단위의 헤게모니 망을 제어하지 못한 채, 공인된 ‘전리품’의 나눔으로 전락할 때가 많다.

총회 폐회 이후 대의적 대표성을 부여받은 총회임원회이지만, 총회임원회 자체가 지니는 제반 편향성과 외부 이익 집단의 개입과 총회장 중심의 수직적 의사결정과정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기는 어렵다. 사안에 따라 총회장을 권위의 정점에 세우고 전권을 부여하므로 난국타개를 위한 대의적 지도력의 권위를 합리화하지만, 총회장의 전권이 총회결의를 이행하는 데 사용되지 못하고, 총회장이 지닌 약점과 이를 자신들의 편리를 위한 지렛대로 이용하는 집단들에 의해 총회결의와는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쪽으로 오용될 수도 있다.

총회 부서나 기관들의 인선과정에 가능한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는 비례적 평등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파생하는 지연과 학연과 금권에 의한 부도덕한 정치문화를 극복할 대안이 없고, 이런 인선과정의 장악을 위해 총회부서들의 장을 차지하려는 헤게모니 집단의 조직적 개입을 막기는 어렵다. 지역순환제도에 의한 (부)총회장 선거에 선거브로커들이 거액의 선거비용을 사용하며 전국 단위 헤게모니 망을 강화시켜 나가고, 그 인자들이 결과적으로 배분과 비례의 정의의 수혜자가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한국교회의 집단적 인격성의 파괴와 도덕성의 추락은 막을 길이 없다.지난 20여 년간 무너져 내린 한국교회의 토대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정의구현을 위한 신앙양심과 도덕적 인격적 기반을 상실한 채 지도자가 된 사람들에게 과연 ‘정의’란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정의’가 어떤 왜곡된 과정과 수단을 거쳐 사사롭게 ‘부정의’를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거듭해 왔는가를 지난 세월들이 증언하고 있지 않는가?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대화 중 트라시마코스는 정의에 관해 ‘더 강한 자의 이익’,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 ‘남에게 좋은 것’이라는 이해들을 제시한다.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정의란 강자의 이익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이해가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할 때 현실적인 일관성은 확실해진다. 그는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에 맞게 법을 제정하고 해석하며 이것을 어길 경우 범법자로 처벌한다고 일갈한다. 정의라는 결과적 공동선을 이루는 과정과 수단이 권력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되며, 거기에 ‘인격성’마저 부여되어 마침내 비윤리적 과정과 수단 자체가 ‘정의’로 둔갑한다.  

평화와 입 맞추는 정의는 도구화된 배분과 평등에 있지 않고 “갈등이 해소된 상태”에 있다. 이항대립의 반목과 냉전적 인간관계의 갈등이 해소된 그 결과에 정의가 있다면, 정의는 “윤리가 실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정의는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치유되고 화해된 관계의 상태로 평화를 동반한다.

한국교회와 사회에 진리의 바람과 향기가 퍼져가는 정의와 평화의 날이 오고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본다. 어떤 풍파에도 요동치지 않는 진리의 심연, 그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정의의 토대를 절차탁마로 함께 만들어가며 함께 세워가는 평화의 세상과 교회, 그 상호변혁의 자리로 오늘 ‘나’와 ‘당신’은 초대받고 있다. 서로를 향한 시선을 나 자신과 우리에게로 돌려 세우고, 신앙윤리의 실천을 가로막는 근본원인이 무엇인지를 십자가 아래서 함께 물으며, 공동선을 위한 신앙양심의 공조와 연대를 아래로부터 만들어 가는 책임윤리의 실천이 요청된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함께 대답하고 실천하자. “정의란 무엇인가?”

이홍정목사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