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통일, 다가오고 있는가

[ 특집 ] 6월 특집-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

김인주 목사
2015년 06월 16일(화) 15:52

한국의 분단상황은 동서독 분단시대와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들이 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독일의 분단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범죄에 대한 징벌로 전후 독일은 4대 승전국의 관할지역으로 분할되었다. 1948년과 1949년에 다른 두 정부가 출범하였고, 동독과 서독은 각기 다른 군사동맹을 통하여 분단은 굳어졌다. 이와 비교한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분할하여 지배하는 냉전시대의 멍에를 떠안게 되었다.  

독일은 45년 만에 다시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1989년 철의 장막의 붕괴는 동, 서독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이듬해 10월 3일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하나가 되는 기쁨을 누렸다. 많은 세월 분열과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은 역사 학습으로, 독일 민족은 억지로 지워진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이 일에 교회는 적극 앞장섰다.

무엇보다도 독일개신교회는 의도적으로 분단의 벽을 넘어서서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2차대전이 끝나자 독일교회는 하나의 단일교회를 구성하였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고 양교회의 교류가 현실적으로 봉쇄한 이후에도 나뉘기를 거부하고 오래 버티었다. 1969년 6월에 들어 동독 정부의 압력으로 동독교회가 독자적인 조직을 구성하게 되자 조직은 동독과 서독의 교회로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하여 교류하고 지원하였고, 약한 교회를 배려하고 존중하였다. 이러한 상호 신뢰가 바탕을 이루었기에, 통일에 대한 소망은 어려운 시대에도 유지되었고, 통일 이후에도 화합하는 일에 큰 힘이 되었다.

전후 독일교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잡은 평신도대회(교회의 날)도 동서독교회의 만남의 장이 되었다. 베를린장벽으로 자유로운 왕래가 어려워지기 이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일교회는 함께 모였고 기도하였다.

분단이 고착화된 시대에도 양 교회는 교류하였고 하나됨을 추구하였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라는 기치로 1980년대에 동서 양 교회에서 매년 11월 열흘간 집중적으로 평화기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틀에서 1989년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의 월요기도회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대전환을 유도하는데 성공하였다. 통일은 우연히 다가오는 대박이 아니다.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라는 상식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민족과 후손의 장래를 위하여 희생하여야 하고, 당장의 열매를 탐하지 말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한다.

또한 독일교회는 자신의 과오를 뼈저리게 회개하였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독일전역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철저히 파괴된 상태였다. 많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을 전란의 피해자인 것처럼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교회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채택하였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민족 앞에 역사청산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5년 10월이었다.

1961년 8월 베를린에 장벽이 설치된 이후 동ㆍ서독 관계가 급속도로 경직될 때 독일개신교회는 튀빙겐 각서를 통하여 교회의 예언자 정신을 다시 확인하였다. 평화정책을 추진하고 인접국과의 화해할 것을 촉구하며 핵무장에 의한 군비증강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격한 반론과 억압이 일어났지만,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의 출발점이 되었다.

북한교회와의 만남에서 우리의 잘못을 먼저 시인하며 고백하는 것을 두고서, 너무 양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와 우리가 달라지는 길 외에는 없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이웃에 대하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자신 그리고 우리 편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며, 상대방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려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악습은 달라져야만 한다.

셋째로, 서독의 교회와 신앙인들은 동독의 동포들을 돕기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하였다. 성탄절이 되면 서독인들은 모두 선물 보내는 일에 참여하였다. 받는 사람을 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이름과 주소 외에 다른 연고도 없는 동포들이었는데, 무조건 동포에 대한 사랑을 베풀었다. 수취인을 기재하지 않는 성탄선물 소포들도 줄을 이었다. 

이런 만남과 교류에 어떤 정치적 간섭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서독 정부의 지원이 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신앙인들의 모금을 통해 동독지역의 많은 교회 건물들이 새로 단장하였다.

동독 목회자들에게 승용차가 지원되기도 하였다. 낡은 차량을 구입하는데도 오래 기다려야 했던 당시 동독의 교회들에게는 큰 특혜였다. 엄한 감시와 차별 속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동독 목사의 딸로 자라나 통일독일의 총리가 된 앙겔라 메르켈도, 동독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가우크 목사도, 이러한 토양에서 연대와 일치를 위한 일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겸손하며 진실하게 그리고 꾸준히 준비하였지만, 독일은 통일 이후에 여러 가지 예기치 못했던 난관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반성에서, 한국은 보다 면밀하게 대비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호사스러운 이야기이다.   

우리는 분단 이후 큰 전쟁을 겪어야 했다. 여기서 비롯된 상호 증오와 불신의 감정은 아직 정리되지 못하였다. 독일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또한 국가 혹은 정부의 정책을 벗어나서 교회가 운신할 수 있는 폭도 매우 좁다. 인도적인 교류마저도 남북관계의 분위기에 좌우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공과 체제경쟁의 구도 말고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는 듯 하다.

오랫동안 우리는 경제력과 사회 수준에서 북한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되면, 저들은 자연히 압도당하리라고 생각하여 왔다. 경제발전에 힘입어 국력에서 큰 차이가 났다고 판단했을 때, 우리나라는 북한을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국면으로 들어섰다. 노태우 정부 때의 일이다.

대화의 장에서 북한을 설득하여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나서도록 유도하였다. 1972년 남북공동성명에 이어 양측의 정상들의 만남이나 공동의 선언문들이 작성되기도 하였다.

국제사회가 지켜보는 가운데 지금까지 총 6건의 합의문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다시 냉전시대로 회귀하였다. 우리의 방식에 따라 무릎만 꿇는다면, 흔쾌히 더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정책을 북한이 과연 따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탈북 동포들이 한국에서 적응하고 정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통일이 된다 하여도 혼란이 심대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을 돕고 섬기는 가운데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교단 차원의 더 많은 지원과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평양노회와 루드비히스부르크노회가 함께 통일의 소망과 경험을 교류하는 일도 시작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더욱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를 바란다.

김인주 목사 /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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