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빚 갚는 일을 최우선으로

[ 교단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 복음적ㆍ에큐메니칼적 선교 '선도'

안교성 교수
2015년 06월 15일(월) 17:36
   
 

조선 정부가 쇄국정책을 씀에 따라, 선교는 선교사의 입국을 통해 국내에서 시작되는 대신, 중국 및 일본 등 이웃나라에서 선교사와 한국인 간의 만남을 통해 시작됐다. 조선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받아들였고, 세례를 받았고, 성경을 번역했고, 복음을 전파했다. 다시 말해, 선교사와 조선 기독교인의 쌍방적인 협력을 통해 조선 기독교가 시작됐고, 해외한인교회가 먼저 생긴 셈이다. 특히 당시 조선 기독교인들은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까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함에 따라 자전, 즉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통을 마련했다.
 
가령 만주에서 사역한 스코틀랜드장로교선교사 존 로스는 김청송 등 권서인이 전도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재한선교사였던 언더우드도 서상륜 등 권서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이 시기의 선교적 유산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희생적인 자전의 유산이 시작됐다. 둘째, 국내외를 넘나들며 전도가 이뤄졌다. 셋째, 해외에서 만난 선교사들이 주로 장로교 선교사라는 점에서 장로교는 이땅의 교회에 일찍부터 영향을 미쳤다.
 
1882년 조미조약(한미조약)으로 선교사의 입국이 가능했고, 1884년부터 입국한 재한선교사들은 잠시 잠복기를 거친 뒤, 청일전쟁(1894-1895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와 더불어, 1898년에는 선교교회(선교사의 지도하에 있는 교회)에 속했던 여성들이 오지선교 지원을 위해 여선교회를 설립했다. 한편 선교사들은 효율적 선교를 위해 개별사역에 협력했고, 선교지역을 나누는 선교예양협정을 맺는 등 에큐메니칼적 선교를 시작했다. 1907년에는 본교단이 독노회 설립을 통해 교단으로 정식 출범했는데, 첫 번째 결정이 선교시작이었다. 이를 위해 처음 안수 받은 7명 목사 가운데 한 명을 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했다. 비록 선교지가 국내였지만, 모든 면에서 전도가 아닌 선교 형식을 갖췄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제주선교를 독자적인 선교로 인식해, 지도자보다는 협조자 역할을 맡은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교단은 독노회 설립 이후 해외교민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다. 이런 선교는 초교파 협력을 통한 에큐메니칼적 선교로 이뤄졌는데, 일본에서는 초교파교단인 재일대한기독교회를 낳았고, 하와이에서는 장로교가 감리교에 선교를 양보하는 일이 벌어졌다. 1912년 총회 설립 시 세계선교를 시작했는데, 바로 중국 산동성 선교이다. 이 선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중국교회, 본교단, 한국과 중국에서 사역하는 미북장로교 선교부 등 4개 단체가 협력한 에큐메니칼적 선교였고, 총회가 최고 인재를 선교사로 파송했고, 선교사들은 현지선교회를 구성하는 팀선교를 했고 또한 중국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했다.
 
이 시기의 선교적 유산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창기부터 선교를 받는 선교교회에서 선교를 감당하는 선교하는 교회로 전환하면서, 선교가 교단의 중요한 정체성이 됐다. 둘째, 국내선교, 해외교민선교, 세계선교 등으로 선교영역을 확대했다. 셋째, 복음의 빚을 갚는 복음적인 교회였다. 넷째, 복음선교에 열심이되, 에큐메니칼적 선교를 실천했다.
 
본교단은, 독노회 및 총회 설립 시와 마찬가지로, 1947년 재건총회에서 선교재건을 결정했다. 6.25전쟁으로 지연되었으나, 전쟁 직후 선교를 시작하면서, 불굴의 선교정신을 과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은 식민시대 종식과 더불어 전통선교의 종식을 가져왔고, 교회 간 협력선교라는 본격적인 에큐메니칼 선교가 시작됐다. 해방 후 최초 선교사인 최찬영 선교사의 태국선교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정성균 선교사의 방글라데시선교가 아시아교회 간의 협력선교라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한편 대만선교를 필두로 해외교민선교가 재개됐고, 에큐메니칼선교 차원에서 미북장로교본부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에큐메니칼선교는 쌍방적 선교라는 점에서 양측의 변화를 초래했다. 가령 미북장로교는 1956년에 레이크 모홍크(Lake Mohonk) 대회를 개최해, 과거 선교지 교회들과 함께 선교과제를 결정했는데, 한국교회의 건의에 따라 서울여자대학교 설립이 결정됐다. 또한 1958년에 선교와 교회일치를 연계하고자 통합선교부(COEMAR: Commission on Ecumenical Mission and Relations)를 구성했다. 한편 본교단은 이제는 선교사가 아닌 선교동역자(mission co-worker)가 된 해외교회 사역자를 맞이하는 등 에큐메니칼 선교를 했지만, 20세기 후반 본격화된 한국교회의 세계선교에 동참하면서 전통선교를 추종하는 모순을 드러냈다. 
 
이 시기의 선교적 유산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역경 속에서도 세계선교 사명을 감당해왔다. 둘째, 에큐메니칼선교에 동참했지만,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고, 본부 및 지교회에 충실히 소통되지 못했다. 셋째, 본교단 선교신학 역시 전통선교관과 에큐메니칼선교관을 조화하지 못했고, 그런 혼란이 본부의 선교구조와 지교회의 선교실천에 반영됐다. 넷째, 교단 초기에 설립된 선교부가 은연중에 해체되어 선교활성화에 장애를 초래했다.
 
1988년 본교단은 에큐메니칼 선교 활성화를 위해 선교를 담당했던 전도부 내 국제선교위원회와 교회일치를 담당했던 총회직할 세계선교위원회를 통합하여 세계선교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다시금 선교는 세계선교부가, 교회일치는 사무총장, 기획국 및 에큐메니칼위원회 등이 분담함에 따라 신학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혼선을 빚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효율적 통합이 재시도 되어야 한다. 세계선교부는 1990년대에는 미전도종족선교 및 구공산권선교 등 전략을 도입했다. 2000년대에는 신생부서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조정의 역풍을 맡으면서도 선교사를 타문화권선교사, 해외한인교회목회자, 에큐메니칼기관사역자 등으로 구분하면서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복음선교와 에큐메니칼선교의 융합을 꾀했다. 이와 더불어 현지선교회를 강화했고, 각종 규정을 보완하는 등 체제정비를 계속해왔다.
 
최근에는 총회, 노회, 지교회와 세계선교부의 연계 가능성이 타진되는데, 장로교회가 선교활성화를 위하여 치리회와 별도로 선교부를 결성했던 역사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세계선교부는 또한 1996년에 '우리의 선교신학'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선교신학 지침' 등을 발표하면서 신학정립에도 힘썼는데, 그동안의 신학발전과 교단선교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문건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 시기의 선교적 유산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와 교회일치의 통합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 둘째, 세계선교부라는 조직이 재건됨에 따라 한국교회 및 본 교단의 세계선교 활성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셋째, 선교신학의 중요성이 인식됐다. 넷째, 외적으로는 세계화 특히 이주 현상 등 다양한 선교과제 및 에큐메니즘과 관련된 교단 내외의 양극화 특히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를 둘러싼 문제 등 다양한 갈등이 대두됐고, 내적으로는 선교사 관리, 훈련,  교육 및 돌봄 등 산적한 문제가 대두되면서, 선교 선진화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본교단은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불굴의 선교정신에 따라 바른 선교, 효율적인 선교를 해나감에 따라 주님 오실 때까지 선교사명을 감당하는데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안교성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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