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H 결연의 확산과 종결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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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6월 15일(월) 16:36

1974년 첫해 KNH 후원금은 청계천 판자촌 200명의 아이들에게 지원됐다. 청계천 판자촌 사람들이 남양만으로 이주한 후 1977년 356명의 아이들이 KNH의 후원을 받았다. 1981년 한아협이 발족되던 해에는 796명이 독일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아협 발족 이듬해 후원 아동의 수는 1000명을 넘어섰다. 

1984년에는 성남제일실업학교를 운영하던 최규성 교장이 지역민들을 위해 세운 성남제일선교원에 KNH 후원이 주어졌다. 전남 보성군 벌교 영송교회에서 운영하던 영송유아원, 노원유아원과 구세군속초영문의 속초유아원 원아들이 KNH 후원자들과 결연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후원아동의 수는 1147명이 됐다. 이때까지 후원시설과 아동들은 속초유아원과 나환자촌 성화어린이집을 제외하고는 농촌과 공단 근처 도시빈민지역에 분포돼 있었다. 

이 흐름은 1985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85년 한아협 회원 교단이 된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선교국을 통해 샘터교회선교원과 광야어린이선교원이 추천됐다. 샘터선교원은 인천시 북구 십정동 무허가 공장과 영세공장지대에 있었다. 광야어린이 선교원은 인천 부평공업단지에 있었다. 구세군에서는 인천에 있는 구세군직업훈련원 후원을 요청했고, 1985년 6월부터 후원금이 지급됐다. 1986년에도 한아협에서는 농촌과 도시 빈민지역 어린이들을 후원했다. 이 때 처음 후원이 시작된 구세군 캐더린유아원은 경남 밀양시 밀양도자기와 유성모직 근처에 있었다. 안양 한무리교회에서 운영하는 민들레어린이집도 군포공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전 빈들교회 섬나의집도 역시 공장지대에 있었다. 평택 지제선교원은 극빈한 농촌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1985년에는 후원아동 수가 200여 명이 증가했으며 1986년에는 100명 정도가 더 늘어났다. 1987년 추가된 후원시설은 김천장전유아원, 창북 에덴선교원, 황지교회 늘봄의집(유아원), 나전중앙교회 선교원, 석항유아원, 대구달구벌어린이집이었다. 대구달구벌어린이집 역시 도시빈민지역에 있었다. 이곳은 한국전쟁과 근대화 이후 빈민촌 형성 이유와 마찬가지로 농촌 이주민들의 집단 촌락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 지역이 여전히 빈민지역으로 남아있게 된 것은 개발 제한 때문이었다. 

1988년 새롭게 후원이 시작된 시설로는 부산시 부암어린이집, 인천 희망꾸러기 유아원 등이 있었다. 이 모두 도시빈민촌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런데 봉천동 희망꾸러기집이 있는 마을은 공장지대는 아니었다. 여의도, 영등포 등지에 살던 도시빈민들이 도심재개발로 1969년 이후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었다. 성남시 은행동 빈민촌 형성과 유사한 이유로 빈민들이 이곳에 모여 살게 됐다. 이곳에서는 도시빈민 2세들에게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었고, 자녀교육과 돌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부암어린이집이 있는 곳은 부산의 대표적인 도시빈민지역이었다.

한아협의 지원은 대체적으로 가난한 농민들과 공장지대 근로자 자녀들에게 집중됐다. 그런데 궁핍함의 이유가 1987년과 1988년에는 다소 다양해졌다. 그러므로 한아협의 지원 사업 또한 변화가 요구됐다. 한아협의 정체성 재확인도 필요했다. 그런데 이때 한아협에서 작은자운동이 시작됐고, 후원회가 발족됐다. 또한 KNH 후원을 받는 결연아동도 1500명을 넘어섰다. 그래서 1988년도 후원까지 3년 동안 매년 3억 60000만 원에서 3억 9500만 원 정도 지원금이 KNH에서 송금됐다. 

1989년 KNH 후원 한아협 산하시설은 총 32개였다. 교단별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시설이 19개, 구세군 5개, 기장 3개, 기독교대한감리회 3개 시설이었고, 한아협 본회를 통해 지원받는 시설이 2개 있었다. 그러므로 1974년 첫 KNH 후원이 예장에 속한 시설에서 시작됐는데, 후원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후원받는 시설들은 대부분 예장에 속한 시설들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동독 통일이 합의됐다. 동독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졌다. 동구권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 국내 상황 변화와 함께 KNH에 재정적인 어려움이라는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됐다. 1990년, 후원이 5년 이내에 종결될 것이라는 KNH의 통보가 있었다. 후원 종결이 통보되기는 했으나 후원이 갑자기 줄지는 않았다. 1974년부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지원되던 KNH 후원금은 이렇게 1993년부터 줄어들어서 1994년 종료됐다.  

/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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