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3000호 특집> "기독교공보, 새로운 지표 향해 등정한 조선교회 전령사이자 공기"

[ 지면으로 보는 기독공보 ] ① 1946년 1월 17일 창간호를 발행하다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5년 06월 15일(월) 15:59

1945년 남한의 교회들 모인 남부대회서 신문 발행 결정
'정부의 주일 선거 반대'해방 후 기독교공보의 큰 업적

해방의 아침이 밝았다. 일제 36년, 그 혹독했던 통한의 세월이 끝났다. 1945년 8월15일 수요일, 일왕의 무조건 항복으로 느닷없이 찾아온 광복은 이 땅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왔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물러난 뒤 이 땅의 기독교는 극심한 갈등에 빠지고 말았다. 그 중심에는 출옥성도, 더나아가 신사참배 논란이 자리했고 그해 8월의 뜨거웠던 날씨만큼이나 가혹했던 순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열됐다.
 

▲ 1946년 1월 17일 기독교공보 창간호 1면.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교계 지도자들은 여러 교단과 중직자들, 교인들까지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구주로 믿는 이상 다른 논란은 소모적이었다. 과연 무엇으로 흩어지고 갈라진 마음을 한데 모을 것인가. 그때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신문이었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이후 한반도는 이념적 소용돌이 속에 빠졌고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미군정은 언론의 완전한 자유를 지향하며 신문발행을 허가제가 아닌 등기제로 전환했고, 자연스럽게 수많은 신문과 잡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던 시대적 배경도 작용했다.

이런 가운데 남한의 교회들만이라도 하나의 총회 아래 다시 모이자는 의견들이 모아졌고, 1945년 9월 8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남한의 교회들이 모인 남부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관식 목사를 대회장으로 하는 일종의 총회가 구성됐고 신문 발행이 드디어 결정됐다. 창간 작업은 교단 출판부장이던 김춘배 목사에게 맡겼고 1946년 1월 17일 <기독교공보> 창간호가 세상에 나온다. 당시 창간호 1면을 장식했던 창간사가 명문 중의 명문이다.

"세계(世界)를 덮었든 흑암(黑暗)의 막(幕)은 임의 것이였다. 이 막(幕)을 통과(通過)하여 오는 그 흑암시대(黑暗時代)의 인류(人類)의 참상(慘狀)은 빈욕(貧慾)과 허영(虛榮)과 지배욕(支配慾)에 차 있는 악마(惡魔)의 발악(發惡)의 과(果)인, 투기(妬忌)와 살육(殺戮)과 파괴(破壞)와 멸망(滅亡) 그것이었다. 이같은 비탄중(悲嘆中)에 파무친 세계(世界)에 만유ㆍ주(萬有ㆍ主) 여호와 이제 한번 목소리 발(發)하시매 창검(槍劒)이 꺾기우고 조일(朝日)이 동천(東天)에 뜨니 악마(惡魔)는 어둠속에 접복(摺伏)하고 마렀다굨 조선(朝鮮)의 교회(敎會)는 새로운 지표(指標)를 향(向)하였다. 그것은 '하나'로써 한다. 구주(救主)도 하나요, 신앙(信仰)도 하나요, 소망(所望)도 하나인 우리는 교회(敎會)의 형태(形態)도 하나라는 것이다. '기독교공보'(基督敎公報)는 이 새로운 지표(指標)로 향(向)하야 등정(登程)한 조선기독교회(朝鮮基督敎會)의 전령사(傳令使)이다. 공보(公報)는 조선교회(朝鮮基督敎會)의 공기(公器)이다. 사(私)를 떠나서 공(公)을, 소(小)를 버리고 대(大)를, 邪(사)를 척(斥)하고 정(正)을, 따를 누르고 하날을 주장(主張)하고 웨치는 만인(萬人)의 것이며 사(私)의 것이 아닌 공기(公器)이다." (발췌 요약)

기독공보 창간사를 살펴본 영남신대 최상도 교수(한국교회사)는 "해방 직후의 시대상과 혼란, 이를 극복하고자 창간한 신문의 다짐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라면서, "창간사를 쓴 인물이 사료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창간의 주역이자 편집인이었던 김춘배 목사가 쓴 글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최상도 교수가 창간사를 쓴 것으로 지목한 김춘배 목사는 1924년 조선기독교서회에서 발간하던 '기독신보'의 편집기자로 재직하다 기독신보 사장이던 하아디의 추천으로 192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칸사이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했다. 1933년 귀국 후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그해 12월 함북 성진의 중앙교회에 부임했다. 그리고 1945년 남부대회의 요청에 따라 기독교공보 창간에 참여했고 초대 편집인으로 활약했다. 이후 장로교 분열시에는 기독교장로회에 참여했고 1948년 4월 대한기독교서회 총무에 피택돼 1967년 정년 때까지 20년간 문서선교를 이끌었다. 창간멤버는 대다수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엘리트 목회자들이 참여했다. 편집부는 김춘배 목사를 필두로 임영빈, 김재준, 최석주, 강태희, 송창근, 최윤관 목사 등이 참여했다. 연세대 교수를 역임한 한국교회사가 민경배 교수는 "기독교공보 편집부원들은 당시 문필력이 있는 인사로서 대개 일본유학이나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엘리트 목사들이었다"면서, "그만큼 기독교공보의 글 내용이 참신하고 사설을 읽어 보면 이들의 실력이 어떠했는가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창간호에는 창간사뿐 아니라 김관식 목사의 '하나되게 하소서' 제하의 시론도 실렸다.

"8월 15일은 아민족(我民族)에게 해방의 음파(音波)가 들려온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다. 그러나 12월 28일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고 길 가던 사람의 발길이 멈추어지고 웃던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진 신탁통치라는 말을 드른 무서운 날이다. 이날의 괴로움은 그대로 정월초 하로의 산듯한 새해의 기분을 눌러 버리고 새해 첫날의 단 음식을 놓은 식탁은 금식기도로 화해 버렸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는 성경말씀에 기초한 언론기관인 <基督敎公報>를 발간한다. 이제 우리는 예언자적인 입장에서 본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슴으로 이 민족을 살려야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누구의 죄라고 할 것없다. 3천만이 회개할 것이며, 정치 운운하여 자기의 뜻이 아니면 조선이 망할 듯 스사로 3천만의 총의를 다 모은 것이 자기의 정신인 듯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이 회개할 것이다. -중략- 다시금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돌이켜 생각한다. 38도선으로 인하여 남부대회만을 소집하여 조직하게 된 것은 유감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북방의 교우들을 생각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남북이 한자리에 모여 완전한 통일로써 주께 영광 돌리며 분리(分離)의 죄로 과거에 망했고 현재에 또한 그럴 위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민족의 죄 많은 피를 씨서야 한다."

시론을 통해 김관식 목사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되지 못하는 한반도의 현실을 개탄했고 갈라진 교회를 향한 아픔을 솔직한 필체로 담아냈다. 이후 기독교공보는 기독교의 매체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은 '한국기독공보'를 설명하면서 "1948년 정부가 주일에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을 때 앞장 서서 이를 반대해 결국 주일선거를 포기하게 했다"면서 이를 해방 후 기독교공보의 큰 업적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독공보는 많은 부침을 겪었다. 경영난도 겪었고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행정조치로 발행을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 7월 지금의 한국기독공보로 제호를 변경한 뒤 편집국장 고환규 목사를 중심으로 대사회, 대정부 강경노선을 견지하며 적지 않은 필화사건에 휘말렸고 이로인해 수 많은 언론탄압을 겪으며 역사의 기록을 이어왔다.

'언론으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해 달라'는 교단과 교계의 주문. 이것은 결국 진실보도를 위한 긴 세월의 투쟁의 역사를 투영한 역사적 요청, 역사 앞에 풀어내야 할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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