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자, 한국 역사를 움직인 기도를!

[ 특집 ] 6월 특집-복음에 담긴 나라사랑

이종윤 목사
2015년 06월 09일(화) 16:27

근대사에서 우리나라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때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의 우리는 세계가 주목하고 모든 나라들이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선진대열에 진입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배후에는 우주 만물과 역사를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이끌어낸 한국교회의 기도가 있었다고 우리는 간증한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국 근대사를 알면 알수록 더 분명하게 이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과연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다.
 
1885년 언더우드, 아펜셀러의 인천상륙으로 시작된 한국 기독교는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도하던 모세, 여호수아, 에레미야, 느헤미야, 다윗, 다니엘, 바울, 베드로 그리고 어거스틴, 요한 칼빈, 주기철, 손양원을 본받아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앞장서서 나라를 구하는 일에 힘써왔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영육의 관계로 비유한 요한 칼빈 목사의 후예들로 자처하는 우리 장로교인들은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하듯 민족과 국가를 위해 쉼없이 기도했다. 
 
1907년 대구의 두 노동자가 삼개월간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나라빚을 갚자고 제안한 국체보상운동에서부터 항일운동, 농촌계몽운동, 3ㆍ1운동, 6ㆍ25전후 복구과정에서 구제사업 등을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했으며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19세기말 한국의 기독교 선각자들은 개혁운동을 벌이다가 1899년 한성감옥에 갇힌 이승만처럼 "오 하나님, 나의 영혼과 민족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민족의 계몽과 번영을 염원하였다. 일제의 노예가 되어 독립의 희망이 사라졌을 때에도 기독교 선각자들은 낙망하지 않고 교회와 학교, 직장과 가정에서 꾸준히 하나님께 조국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였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회의가 열리자 그들은 분기하여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재건하는 일에 착수했다. 중국 상해에 모인 이동녕, 손정도(목사), 현순(목사) 등은 1919년 4월에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족시키면서 임시헌장에 '대한민국은 신(神)의 역사에 의하여 건국된 국가'임을 명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의회에서 서재필, 이승만, 유일한, 민찬호(목사) 등 지도자들이 3일간 회의를 시종 기도로 인도하면서 새로 수립하는 대한민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함석헌은 "이렇게 해방이 올 줄은 독립군도 몰랐다. 이는 하늘이 준 떡이다"라고 말했다. 33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11월 28일 김구와 함께 서울 정동예배당을 방문하여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불같은 악형을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온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라고 당부했다.
 
1948년 총선거를 통해 선출된 제헌 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 이승만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갑자기 회의 순서에 없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이윤영 의원이 인도하게 했다. 민생복락, 남북통일,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 대한민국은 출발을 한 것이다.
 
1885년 언더우드가 복음을 들고 조선땅에 들어오기 전 79명의 조선인들이 세례받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로스 선교사가 번역한 우리말 성경이 들려 있었다. 성경 500권을 갖고 국경을 넘다 국경관리들에게 빼앗긴 서상륜은 울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읽고 감동받은 관리가 50권을 돌려줘 들고 온 성경이다. 흑암의 땅에 빛을 비추는 일에 50권의 성경이면 충분했다. 기도하는 이들로 인해 평북과 황해도까지 결신자가 나타나 소래지방에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통해 기울어지기 시작한 조선 사회는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심한 혼란과 국토는 피폐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지배층은 파쟁만 계속했다. 매관매직, 막중한 조세제도로 국가는 병들어 신음하고 있었다. 1903년 원산지역 선교사 모임에서 회개운동이 폭발되어 서울, 개성, 평양, 선천, 광주, 대구, 제물포까지 회개의 물결이 흘러 넘쳐 조선의 민족각성을 일으키는 1907년 미신을 타파하고 기독교 대각성운동의 역사가 일어나 무너진 사회윤리를 재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1918년 1차대전 종전으로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주장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에 동경 YMCA회관에서 독립선언 선포식을 가졌다. 거의 전원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때 독립선언문과 결의문 낭독 후 윤창석이 "하나님이시여, 저희 민족을 인도하여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다. 3ㆍ1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으며 전국의 교회가 있는 곳마다 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이때 제암리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가 파괴되었고, 기독교는 심한 박해 아래 놓이게 된다. 
 
1919년 3월 3일 강서지역에 독립단 통고문이 살포되었는데 "…신자는 매일 세 때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억압자에 대한 적대와 폭력을 자제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독립하자"고 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은 한국 언론의 여명을 연 독립신문 창간호를 애국심과 간절한 기도로 발행했다. 조선의 무지몽매를 깨운 서양 도깨비들로 불렸던 선교사들의 희생과 기도로 조선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질병에서 민족을 건진 근대의학의 선구자 알렌 선교사의 기도가 가난과 질병의 나라를 구출해냈다. 한국 여성의 존엄성을 찾아준 교회, 서양 음악과 문화예술, 체육의 요람도 기독교의 몫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순교자의 피멍든 땅에 핀 꽃이다. 1886년 셔먼호를 타고 왔으나 입국 저지를 받고 최초의 순교자가 된 R.H.토마스 목사를 비롯, 일제 신사참배 반대하다 순교한 이들, 하나님의 뜻과 자유 수호를 위해 북한 공산 치하에서 순교한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다.
 
6ㆍ25전란 때 대한기독교 구국기도회가 주관한 목사 장로 기도운동 후 전세가 역전되었다. 피난지에서 이승만은 "하나님, 총이 없는 우리 아이들을 보살펴 주옵소서"라며 매일밤 대구에서 절규하며 기도했다. 맥아더 장군도 미국의 극동사령관으로서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도 그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이승만은 기도로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4ㆍ19의거 배후에도 대학생들의 부정부패 일소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금식기도한 이들이 있었고,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새마을 운동을 일으킨 배후에도 기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파송도 기도하는 이의 비전으로 이루어졌다. 월남전 참전은 한국을 살린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은 숱한 사선 속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았다.
 
울라, 기도하라, 네가 할 일을 하라 하신 한경직 목사의 외침처럼 국가의 위기 때마다 기독교인들은 어김없이 전국 기도회를 개최했다.
 
북한의 도발이 고조되고 국내적 혼란이 가중된 시기에 국가를 위한 기도가 이 나라 교회들의 기도의 주제가 되어 왔다. 70년대 교회 기도와 부흥이 한국경제 발전의 엔진이 되었다. 군선교를 통한 한민족 75% 신자화 운동, 서울올림픽 성공, 월드컵 성공 유치 사례도 기도로 이루어졌다. 세계사를 바꿔 쓰는 25000명의 한국의 선교사들, 신학자 1500명 시대가 열린 것도 교회의 기도의 열매다. 대한민국은 기도로 세워졌고 지켜진 나라다. 한국 역사를 움직인 기도의 힘을 잊지 않는 한국교회와 민족이 되어야 한다.

이종윤 목사/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ㆍ서울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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