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 '연금', 길을 묻다

[ 주필칼럼 ] 주필칼럼

이홍정 목사
2015년 05월 20일(수) 09:40

19세기 독일 천문학자 A. F. 뫼비우스의 연구로 널리 알려진 '뫼비우스의 띠'는, 직사각형의 띠 모양의 종이를 한번 꼬아서 끝과 끝을 연결했을 때 생기는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 밖에 없는 이차원 도형이다. 안과 밖, 앞면과 뒷면의 구별 없이 하나의 면을 지닌, 좌우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비가향적 곡면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어느 지점에서나 띠의 중심을 따라 이동하면, 출발한 곳과 정반대 면에 도달할 수 있고, 계속 나아가 두 바퀴를 돌면 처음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만약 개미가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표면을 이동한다면, 경계를 넘지 않고도 원래 위치의 반대 면에 도달하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바깥쪽에서 칠을 해가면 안쪽도 모두 칠해진다.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고,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지을 수 없는 입체, 이것이 뫼비우스의 입체이다.
 
12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프롤로그인 '뫼비우스의 띠'에서, 수학교사는 학생들에게 굴뚝청소부 이야기를 한다. 두 아이가 굴뚝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다른 아이는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어느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한 학생은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평면적인 답변이다. 이에 대해 교사는 인식의 혼돈을 제공한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아이를 보고 자기 얼굴도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얼굴이 깨끗한 아이는 상대방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사는 이어지는 답변을 통해 새로운 혼돈의 질서를 제공한다. 두 아이는 함께 똑같은 굴뚝을 청소했다. 따라서 한 아이의 얼굴이 깨끗한데 다른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애당초 깨끗한 아이, 더러운 아이라는 이항(二項)대립의 설정은 허위다. 뫼비우스의 띠를 생각하라!
 
안과 밖, 시작과 끝의 대립구조가 어느 지점에서 굴곡을 이루고 꼬여 같아져 버리는 뫼비우스의 띠는 먼저 출구 없는 순환구조 안에 감금된 존재가 겪는 불안과 분열과 공포로 인한 실존의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두려움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 시작과 끝을 의심 없이 상정하고 목표를 향해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직선적 이분법적 이항대립의 세계관이 지닌 허위적 현실인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초대한다.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고,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지을 수 없는 뫼비우스의 곡면체는, 인식의 혼돈과 전환을 통해 대립적 세계의 허상과 이분법적 세계관의 단순성을 초극하는 카오스모스(chaosmos), 혼돈(chaos)과 질서(cosmos)의 합성, 즉 '혼돈 속의 질서'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대립의 초극을 위한 카오스모스를 상상하라!
 
오늘의 현실은 이항대립으로 고착화된 현실이 아니다. 각각이 굴곡의 지점에서 타자와 조우하며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초극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항대립의 세계관 자체가 각각의 질적 변환을 요청하는 상태이다. 타자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혼돈'은 타자를 통해 주체와 대상,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재정립하게 하는 중요한 관건이다. 인간의 이해 과정은 하나의 거대한 순환의 고리를 통해 거듭하여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이 모든 이해의 과정은 단순히 객체적 현상 간의 논리적 연관에 따라 진행되는 단순반복이 아니다. 이해하는 주체 자신의 이해 행위에 대한 지속적인 재고(rethinking)를 통해 거듭 새롭게 이해되는 나선형 진보의 과정이다. 시작점과 끝 점이 서로 만나면서도 시작점의 앞면이 끝 점의 뒷면과 맞물려 연결되는 뫼비우스의 띠, 이 띠의 앞면을 사물의 객체적 양상, 뒷면을 주체적 양상이라고 한다면, 이해의 순환 고리는 객체적 양상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주체적 양상에 대한 이해로 되돌아와 맞물리게 된다. 주객도식이 해체되고, 상호주체적 인식의 길이 열린다. 네 자신을 보라!
 
뫼비우스의 띠의 함의에서 생각할 때, 작금에 연금재단 이사 임기문제를 계기로 벌어지는 이항대립은 사실상 허구적 현실세계이다. 깨끗한 아이와 더러운 아이를 상정하고, 더러운 아이가 씻는다는 직선적 평면적 이항대립에는, 더러운 아이를 통해 더러운 자신을 깨닫는 '혼돈의 성찰'도, 굴뚝청소를 한 아이들은 모두 더럽다는 인식에서 비롯될 수 있는 '혼돈 속의 질서' 찾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랑도 반성도 없다. 그래서 대립의 경계는 점점 더 분명해진다. '분노' 속에 드리운 사랑의 그림자와 '연민' 속에 반사되는 사랑의 빛이 교합하는 굴곡의 지점, 그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의 지평도 안 보인다. 사랑 없는 욕망으로 점철된, 가진 자들의 권력의지의 충돌 속에, 가난한 사람들의 밥숟갈이 비어간다. 사랑이 거세된 소유의 욕망 때문에, 인간과 세상, 그리고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생명경제가 되어야 할 '연금'이 죽어간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향한 욕망이 만들어낸 순환구조에 감금당한 채, 회복 불가능한 불구성이 강화되어가고 있다. 끝내 파산의 길로 치달을 것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차하며 돌고 돌아, 너와 내가 함께 거듭 처음 자리로 돌아오는 곡선의 '혼돈', 그것이 제공하는 성찰의 과정을 통해, 잃어버린 신앙의 첫사랑, 잊혀져가는 그 첫사랑의 기억을 재생하며, 치유와 화해의 길, 카오스모스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 참과 거짓이 이항대립을 일으키는 허위적 현실에서, 기존의 타락한 이항 대립적 현실과 인식의 틀에 '혼돈'을 만들어내고, '총회결의'라는 공동의 변곡점에 함께 서서, 이제는 새로운 희망과 사랑과 참의 질서를 지향해야 한다. 그 길 위에서, 다시 비극과 증오와 거짓의 길, 대립된 허위적 현실을 거듭 만날 수밖에 없더라도, 뫼비우스의 변곡점, 공동의 회심의 지점을 거듭 통과하며 카오스모스를 지향해야 한다. 뫼비우스의 띠를 생각하라!

이홍정 목사/총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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