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밖을 목회하는 목사

[ 기고 ] 독자투고

이승엽 목사
2015년 05월 15일(금) 10:51

카페교회의 목사는 커피와 카페를 통한 실천적 목회를 한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살아간다. 직면한 현실에서 뚜렷한 수치적 결과가 없다고 해서 그 결과에 대해 자신의 운영의 미숙함, 그리고 관리의 부족함을 살피는 차원을 넘어서 감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축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섣부른 짓이다.
 
무엇보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그 길을 걸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카페교회의 목회자는 '위선적 즐거움'이 아니라, 부족함에 관한 통찰력과 성경의 말씀의 현장 적용이라는 체질 변화를 모색하는 확증된 재료로 사용해야 한다. 목사로서 카페교회를 운영한다는 것은 말이 필요없는 목회 현장의 실재이지 대안이 아니다. 말이 좋지 '대안'이라는 말은 탁상공론과 책상물림의 서재에서 나올만한 억지논리에 불과하다.
 
카페교회 목회는 경험을 통한 실천적 논리와 명령이 수반된 임무이다. 우린 이 임무를 받은 목사다. 목회가 무엇인지 번민하고 고뇌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카페교회 목사의 절대적 임무는 세상에서 신앙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아직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않은 구도자들에게나 살아 계신 예수님의 전설을 드러내는 것이다.
 
카페교회를 통해 교회밖을 목회한다는 것은 사실 별로 재미는 없고 피곤하며, 늘 부담감과 불안을 느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카페교회 목사는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예수 없음의 공허함을 커피 한 잔의 진실된 봉사로 채우는 예수의 제자이며 구도자이다.
 
지금 척박한 신앙의 현실은 지난날, 이 땅에서 예수께서 걸으셨던 것처럼, 믿음의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애써 잊으라고 강요한다. 물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신분으로서나 편하고 싶지 않은 목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편함과 목회 성공의 가치가 돈과 인원수의 있고 없음, 건물의 크기라는 논리적 기준에 의해서 정해지지 않는다.
 
특히 카페교회를 바라보는 시선들 중심에는 경제적 자립의 문제만을 해결하려는 싸구려 천박한 목회라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있다. 어떻게 먹고 마시며 사는 문제가 그렇게 쉽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식탁공동체를 여시고 제자들과 그리고 수많은 이들과 식사하신 예수님께서 천박한 분이신가? 또한 당시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을 모르시고 그렇게 그 식탁공동체의 길을 여시고 걸으셨던 것인가?
 
'방법론'의 문제와 '본질'의 문제를 혼동하고, 혼용하는 이들의 질시는 오히려 카페교회의 목사에게 행복한 현실적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이 현실적 즐거움은 더 나아가 성령의 임재를 설명하는 '일터 신학'을 다루도록 이끌어주며, 목회에 대한 주변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고 해결하기 위해 카페교회 목사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한다. 그래서 카페교회의 목사가 걱정해야 할 일은 '천박하고 싸구려'라는 비난이 아니라, 자신의 카페교회의 목회라는 방법(전도)과 행동(선교) 속에 "성육신의 본질이 담겨 있는 진실된 고백이 계속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자신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구도자들의 '진정한 경험'이었던 것처럼, 카페교회 목사는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 속에 하나님의 주도권인 '의로움'과 '구원'의 현실을 날마다 수시로 경험하고자 하여 커피 한 잔에 예수님께서 주신 자신의 '열정'을 담는다.
 
목사는 목회로 자신의 신앙, 즉 믿음과 신념을 드러낸다. 그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내적가치가 줄면 저절로 그 자리를 감각이 대신한다." 카페교회 목사는 어그러진 감각적 현실에 대항하는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커피 한 잔과 카페교회의 공간을 통해서 사랑과 헌신으로 드러낸다. 이것이 카페교회 목사가 교회 밖을 목회하는 이유이며 '영혼과 육신의 가시'이다. 


이승엽 목사/예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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