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주신 '마음의 샘터'

[ 김 대사의 북한 엿보기 ]

김명배 대사
2015년 05월 12일(화) 12:48

김명배
前 주 브라질 대사ㆍ예수소망교회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마음에 깊이 각인된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일생 뇌리 속에 깊이 새겨진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나의 대학시험 '낙방'에 얽힌 가슴아픈 사연과 연관이 있다. 어머니는 막내인 내가 서울법대에 들어가기를 소원하셨다. 텔레비전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50년 대 말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새벽 5시에 방송되던 KBS라디오의 '마음의 샘터'는 당시 온 국민이 애청하던 인기 있는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이른 새벽 집집마다 골목마다 울려 퍼지던 임택근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수 십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어머니는 속필이고 달필이었다. '마음의 샘터'를 하루도 빠짐 없이 노트에 적어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나에게 주셨다. 표지에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1960.3.14'라고 적혀 있었고, 지금도 나의 서재에 고이 모셔져 있다. 

말씀은 안 하셨어도 나의 대학 합격을 간절히 소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선물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시험에 떨어졌다. 솔직히 나 자신보다도 어머니께 드린 실망이 더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의 자존심에 상처를 드린 것이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청빈한 목사의 맏며누리이자 강직한 목사의 아내로서 홀로 굳굳이 자존심을 지키며 5남매를 키우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낙방의 쓸쓸함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해질녘에 늘 하던 습관대로 "어머니!" 부르며 집안에 들어서니 덩그러니 빈 집안의 컴컴한 안방에서 벽장을 향해 소리 없이 흐느끼며 파도치는 어머니의 어깨 뒷덜미가 망막을 강타했다. 

필자는 일생을 외교관으로 해외를 전전하며 살았기 때문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제대로 모신 적이 없어 늘 마음에 걸린다. 물론 효성이 지극한 큰 형님과 큰 형수님이 극진히 모셨지만 자식의 도리를 못했다는 자책감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 

1982년 주미대사관으로 발령을 받아 출국에 앞서 어머니와 큰 형님께 여권과 항공표를 드리면서 꼭 워싱턴에 다녀 가시도록 신신 당부를 드렸는데 이듬 해에 갑자기 돌아가시게 돼 지금도 마음에 한이 맺혀 있다. 

'어버이주일'을 보내며 '사철에 봄 바람 불어 있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는 생전에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을 온 교인이 즐겁게 부르는 데 솟구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닲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 뿐인가 하노라' '반중 조홍 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 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서러 하나이다' 해마다 어버이 날이 오면 벽장을 향해 소리 없이 파동치던 어머니의 어깨와 등이 눈에 서려 불효자는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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