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인간화는 곧 인간의 기계화

[ 말씀&MOVIE ] 말씀 & MOVIE

최성수 목사
2015년 05월 11일(월) 16:34

<채피> 감독 : 닐 블롬캠프, SF, 15세, 2015

닐 블롬캠프 감독은 이미 두 편의 SF 화제작을 통해 현실에서 공공연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사악한 단면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해 경각심을 높였다. 예컨대 '디스트릭 9'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비판하였고, '엘리시움'에서는 글로벌 문제인 환경오염과 빈부의 양극화 그리고 의료혜택의 독점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하였다. 두 작품이 현실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면, 이번 작품을 통해서 블롬캠프는 결코 제지할 수 없는 인간의 호기심에 따라 탐구되는 테크놀로지의 미래와 관련해서, 특히 전 세계적인 관심사인 인공지능을 주제로 다루면서, 기계의 인간화가 결국 어떤 파국으로 이어질 것인지를 예측하고 있다.

채피, 곧 인공지능은 물론이고 감성과 학습능력을 가진 휴머노이드는 단순히 인간의 욕망을 투영하는 역할에 제한되지 않는다. 채피는 심지어 인간의 종교적인 욕망인 영원한 삶의 가능성을 넘보기까지 한다. 결국 기계의 인간화가 실현되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인간이 기계화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비판적이면서도 비관적인 전망을 내비친다.

블롬캠프가 이렇게 인간의 기계화를 내다보게 된 데에는 그의 인간이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곧 정신과 육체로 이뤄진 인간에서 본질은 정신(마음 혹은 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신경생리학의 연구가 뇌와 인간의 생각과 활동의 관계가 인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만일 본질인 정신이 데이터의 형태로 보존될 수 있다면, 그리고 인공지능에서처럼 데이터를 통해 정신 현상을 재현할 수 있다면, 비록 몸은 달라진다 해도 정체성은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포함한다.

기계의 인간화와 더불어 일어나는 인간의 기계화는 엄밀히 말해서 과거 영혼을 인간의 본질로 보고 불멸의 영혼이 다른 몸을 취할 때 일어나는 정체성 혼란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과 비교해볼 때,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몸이 기계로, 영혼이 정신(마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환생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독교가 영혼과 몸의 교환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는, 인간은 인격으로서 몸과 영혼을 더 이상 독립된 실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설령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되어 기계의 인간화가 가능해진다 해도, 인간의 기계화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출생과 더불어 문화 안에서 성장하면서 인간에게 축적된 지적 혹은 감성적 정보는-만일 태중에 있을 때부터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데이터화하지 않는다면- 데이터로 결코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적인 환원주의에 근거한 생각은 단지 가설에 불과할 뿐이며, 아직까지 논란 중에 있다. 필자의 소견에 따르면, 인간의 한계에 부딪혀 결코 현실적으로 입증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신학적 인간학의 입장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계의 인간화로서 채피가 다른 로봇과 교체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한층 더 나아가 인간의 기계화 가능성까지 말한 것은 논리적인 비약에 따른 추정이다. 기억이란 단편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일어나는 모든 기억을 데이터로 복원한다 해도 그것으로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체성은 체계적이고 일관된 의식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무리한 추정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런 무리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영화와 특별히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감독이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를 추구하려는 욕심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 생각한다.

한편, 영화적인 전제나 주장과는 별개로 스토리와 관련해서 기독교적으로 주목할 만한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채피가 설계자 디온에게 자신을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만들었음을 항의하는 부분이다. 이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복제된 기계인간이 가졌던 불만이면서 또한 그들이 제기했던 질문과 동일하다.

물론 내용적으로 본다면, 더 이상 다른 것으로 교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던 로봇으로 실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영생의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택함으로써 타락하여 가능성을 상실하였던 아담의 이야기와 오버랩 된다.

뿐만 아니라 타락 후 온갖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한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채피가 가진 욕망과 다르지 않다.

다른 하나는 비록 채피가 뛰어난 지능과 경험을 통한 학습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이제 갓 태어난 아이의 수준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좋은 교육을 통해 좋은 로봇으로 기능할 수 있었겠지만, 잘못된 교육으로 각인된 후에는 로봇 갱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블롬캠프는 인간은 남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리와 오리새끼들의 관계처럼 처음에 누구에게서 각인되느냐에 따라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어느 정도 숙명론의 느낌을 받는다. 기독교가 인간에 관한 생각에서 전제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인된 상태가 숙명처럼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말씀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본다.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