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5월 11~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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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06일(수) 13:28

월-어버이를 위하여
본문 : 룻 1:15~18
찬송 : 579장

이 땅에 모든 것이 변하지만 변할 수 없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오늘 본문은 한 며느리가 어머니에게 드렸던 사랑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어버이를 향한 보은의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어버이의 가치관을 계승하는 것이다. 사람은 한 평생 살면서 나름대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형성하고, 세상을 떠나갈 때는 그 가치관이 남겨지거나 계승되기를 소원한다.
 
룻은 원래 이방여자인데 시집을 와서 시모인 나오미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야훼신앙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룻은 새로운 가정에서 신앙이라는 가장 위대한 가치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죽자 시모는 자부들에게 "너희들이 원한다면 이 땅에서 살아라, 나 혼자 고향 갈거야"라고 말하자 룻이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감동적인 고백을 한다. 우리는 부모가 내게 다른 소원, 다른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해도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다면 한평생 감사해야 한다. 효도란 다른 것이 없고 어버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함께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둘째, 어버이와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필자의 곁에는 늘 엄마가 있었다. 이것보다 더 커다란 행복이 어디 있었는가? 아기의 행복은 엄마가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을 경험시키는 도구였던 부모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늙어가고 정신적으로는 심리적 유아기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부모가 원하는 것은 자녀들이 그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아기시절 그렇게도 손을 내밀어 그 허공 속에, 어둠 속에 확인하고 싶어 했던 우리 부모의 임재를, 반대로 늙어가는 우리의 부모는 자녀들이 그렇게 그 곁에 머물러 주기를 원하신다. 우리 어버이가 베푸신 그 사랑에 대한 보은, 어버이와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셋째, 어버이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얼마나 구체적으로 부모로부터 모든 필요를 공급받았는가? 사랑은 구체적으로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어버이는 독립심을 서서히 잃어가면서 누군가를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이제는 우리가 어버이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할 그런 시간이 되었다. "아가야 너는 네 땅에 머물러 있어라. 팔레스타인 땅에 온 후에도 너는 재혼해야 돼."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부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던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풍성한 이삭을 줍게 되자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어떻게 부모님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공급하는 사랑의 자리에 설까?
 
오늘의 기도
 
어버이를 통해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 새기고 인생의 남은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주연 목사
세계로교회

화-성공보다 경건
본문 : 약 1:26~27
찬송 : 270장

좋은 집, 멋진 자동차,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여행, 맛집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얻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며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며 애쓰며 기도한다. 즉, 성공하길 원한다. 교회와 성도의 위기는 그리스도인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영적이라 생각하는 기도하기, 헌금, 예배 드리기도 세상적인 성공을 위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을 지향하기보다 경건해야 한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유지되고 하나님께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경건도 거짓된 경건과 참된 경건이 있다. 그렇다면 거짓된 경건은 무엇일까?(26절)
 
첫째,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구제도 하고 기도도 드렸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경건하다고 생각했다. 종교생활을 했기 때문에 경건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바리새인의 종교활동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종교활동은 아무리 많이 해도 거짓된 경건이다
 
둘째, 혀를 조심하지 않는 것이다. 잘못된 언어구사로, 막말로 사회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수많은 비판을 받는 경우를 본다. 참으로 열심히 봉사하면서 입으로 다 까먹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언어 선택을 신중히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주는 막말은 삼가야 한다. 비판과 욕을 하지 않아야 한다. 혀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거짓된 경건의 모습이다.
 
참된 경건은 무엇일까? 첫째는 특별히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이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알아주지 않고 어렵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실제적 도움을 주는 것이 참된 경건이다. 더불어 사는 마음을 가지고 고통받는 자들을 섬기는 것이 참된 경건이다
 
둘째는 정결한 마음이다. 깨끗한 마음이다.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해서는 안된다. 세상은 거짓이 판을 치고 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 사람은 거짓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모든 의도가 순수해야 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참된 경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공보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럴 때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성장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말뿐이 아니라 삶에 경건이 나타나게 하시어 겸손하며 정결하게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광환 목사/동현교회

수-아플 때는 아프다고 하라
본문 : 욥 30:16~23
찬송 : 559장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침묵을 강요한다. 아프더라도 주변에 부담을 주지 말고 혼자 속으로 삭이라고 말한다. 아프더라도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시리라 믿고 기쁘게 살아야지 자꾸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욥은 쉬지 않고 자신의 결백과 고통을 호소한다. 욥에게 또 다른 어려움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아픔이었다. 지금까지 욥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에 있었기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악하게 대하는 것을 수용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욥은 가정과 사회 공동체 안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의 외침은 외면당했다. 욥은 짐승 취급을 받으며 더욱 서럽게 통곡한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욥은 고통스러울 때 고통을 표현했다. 친구들이 듣기 부담스러워 해도 속으로만 삭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 않았다. 태연자약하는 것이 좋은 믿음의 증표는 아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가정 공동체적 차원으로 해석해야 한다. 아픔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없다면, 이는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가정 공동체의 성숙도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욥이 아플 때 욥의 아내는 떠났다.
 
둘째로, 우리들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친구들조차도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는 마당에 하나님마저 외면하실 때,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들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시기 때문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졌다(계 8:1)"고 했다. 그리고 금향로를 가진 천사가 등장한다. 금향로는 성도들의 기도라고 설명하고 있다(계8:3). 하나님의 침묵은 성도들이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그분이 귀 기울여 듣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로, 재앙을 당할 때에 부르짖어야 다른 사람의 구조를 받을 수 있다. 사람은 넘어지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을 편다. 그래야 더 크게 다치지 않기 때문이다. 욥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울어 주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아파했다. 누군가의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유대주의적 사고방식이다. 고난의 원인이 죄 때문은 아니라고 주님이 언급하셨다(요 9:3). 예수님은 내 아픔을 아셨고 내 소리를 듣고 계신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이 민족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은석 목사
신리교회

목-믿음의 가문은 효로 이어진다
본문 : 룻 1:6~18
찬송 : 393장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축복은 주로 누구 때문에 받게 될까? 부모 때문이다. 반대로 부모의 불신, 믿음 없음이 자식에게로 이어지는 모습도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자녀에 대한 걱정과 염려보다는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부모 자신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먼저 필요하다는 뜻이다. 믿음의 가문을 이루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룻을 통해 믿음의 가문이 이어지게 된 결정적인 역할은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했다.
 
첫째, 우상의 땅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고 다시 믿음의 땅으로 돌아가 믿음을 지킨다. 이 때문에 며느리인 룻도 믿음을 잃지 않게 되었다.
 
둘째, 우상을 믿던 이방여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만들고 또 믿음의 본을 보여준 사람이 나오미였다.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진 부모일지라도 자녀가 그 믿음을 계승하지 않으면 믿음의 가문은 이어질 수가 없다. 부모를 신뢰하고 존경하지만 '나는 부모와 다르다, 나는 부모와 다른 길로 가겠다'고 하면 그만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다른 며느리인 오르바처럼 룻도 돌아가 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가문은 여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믿음의 가문이 이어지는 것은 부모와 함께 자녀의 책임도 막중하다.
 
왜 오르바는 룻과 달리 믿음의 길을 완주하지 못한 것일까?
 
나오미는 오르바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네 원래 이방신을 다시 믿으라고 보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며느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시험을 해서 진짜면 데리고 가고 가짜면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한 것도 아니다. 나오미의 마음은 너희 둘 모두 나를 따라가려거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뜻이다. 오르바는 이런 시어머니의 속마음을 제대로 몰랐고, 롯은 제대로 알았다.
 
나오미의 속마음은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오미의 마음은 힘들더라도 함께 있어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부모는 자식과 함께 있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결국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 믿음의 가문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의 마음을 참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내 마음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이 되어 이해해야 한다.
 
룻이 복을 받은 것은 자신의 믿음보다는, 어머니를 마음으로 이해하는 효심 때문이다. 믿음의 가문은 믿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믿음이 대대로 이어지려면 반드시 효심이 있어야 한다.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이 믿음이 대를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오늘 우리 가정에 믿음을 주신 하나님, 이 믿음이 사랑과 효를 통해 대를 잇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주성 목사
광주서석교회

금-엘리의 두려움
본문 : 삼상 4:12~22
찬송 : 279장

본문에는 블레셋의 침략에 법궤까지 빼앗기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참패와 동시에 철저하게 몰락해 버린 엘리 가문의 비운이 언급되어 있다. 엘리는 두 아들을 엄격하게 훈육하지 못해 불량한 자식들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행실이 불량했던 두 아들은 하나님께 드릴 성물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여인들을 희롱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했음을 성경은 전해준다.
 
17절에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충격적인 말씀이 나온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상징이었다. 이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때와 장소에 등장했다. 가나안 입성에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먼저 들어가게 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맨 앞에 서서 성을 돌았다. 그러자 강물이 멈췄고 성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쟁터에 이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던 것이다. 군사 사천 명이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대패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궤마저도 빼앗기고 말았다. 언약궤를 뺏긴 것은 전쟁의 참패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엘리는 언약궤의 소식에 놀라 죽음을 맞았다. 4장 13절에는 법궤를 전쟁터에 내보낸 대제사장 엘리의 극한의 불안하고 두려운 심정을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고 나타낸다. 엘리는 언약궤를 메고 나가려는 자신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하나님의 궤만은 안 된다며 말렸어야 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자격을 상실한 사람들이었다. 엘리는 삼상 3:11∼14에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받았으므로 이미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두려움 속에서 지내던 엘리에게 들려진 소식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질 만큼의 큰 충격이었음이 분명하다. 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 이상 볼 수 없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엘리는 알았기에 극한의 두려움으로 마음이 떨렸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있었는데 왜 패배했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 자체에 대한 신앙은 없고 언약궤의 능력을 의지한 미신적 신앙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이 없이 상징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은 미신적 신앙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만 능력이 있음을 몰랐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를 빼앗김으로써 궤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보다 크신 분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궤를 갖고도 패배함을 보며  참된 신앙을 배우며 깨닫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도원 목사/작은빛선교교회(대구소년원)

토-아브라함의 길
본문 : 창 12:1~9
찬송 : 370장

오늘 우리에게 영향을 많이 끼치는 서양 사상의 양대 사조는 헬라 사상과 헤브라이즘이라 부르는 히브리 사상이다. 헬레니즘은 합리적 이성의 활동을 장려하여 정치, 사회, 예술 전반에 걸쳐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다. 반면 헤브라이즘은 합리성을 초월하여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두고 발전된 사고 체계이다. 헬레니즘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세속 정부의 목표가 되었다. 이들의 방법과 목표는 다 좋지만 하나님이 없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앞의 삶이 행복이므로 언제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추구했고, 역사를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임을 선포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둘이 서로 충돌, 보완하는 과정이 인류사상사라 할 수 있다.
 
인류의 이런 두 사상의 흐름은 이미 성경에 그 기원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를 자세히 읽으면 세상에서의 성공과 큰 성취는 하나님의 사람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귀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중심하여 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처음 도성을 건축한 이는 가인이다. 하나님이 보장한 안전의 표를 믿지 못하니 스스로 안전을 도모하여 에녹성을 건축한다. 이런 가인의 후손에게서 온갖 문명이 발아되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반면에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한 셋의 후손에 대하여 성경은 별 업적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셋의 계보 중 눈에 띠는 사람은 에녹과 노아 정도인데 이들 모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는 기록이 전부다.
 
세월이 흘러 노아로부터 여러 족속이 생겨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동쪽 시날 평지에 자리한 족속들은 도시를 건축하고 탑을 쌓았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내며 흩어지지 않고 모여 살며 스스로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거기에서 그들은 화려한 문명을 꽃 피웠다. 하나님은 그곳 중심 시날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믿고 가나안으로 이주한다. 그 결과 척박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 곳 가나안에서 도시 대신 장막생활을 하고, 시날 사람들이 쌓는 탑 대신 제단을 건축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려한 시날 사람과 달리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이름 부르기를 즐겨했다. 성경은 인류문명을 둘로 나눈다. 하나님 없는 화려한 문명과 하나님을 단순히 신뢰하는 문명이 그것이다.
 
오늘의 기도
 
아브라함 같이 이 땅을 나그네로 살게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을 부르며 주를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진숙 목사/거창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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