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죽음과 일상

[ 말씀&MOVIE ] 말씀 & MOVIE

최성수 목사
2015년 04월 27일(월) 19:19


<화장>
감독:임권택,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4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오프닝 신을 주목해야 한다.
영화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실을 오가며 전개되는데, 베옷이 아니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상여를 매고 모래밭을 걷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원작을 알고 있거나 혹은 영화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접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오 상무(안성기 분)의 죽은 아내(김호정 분)의 상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장면은 화장터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나는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오 상무 시선의 대상인 추 대리(김규리 분)가 눈에 확 띄는 의상으로 행렬 속에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두 번 나타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간과하기 쉬운 장면이다. 왜냐하면 상여 행렬은 영화 속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장면은 감독이 오 상무가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따라서 영화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죽음의 행렬 속에 추대리에 대한 오상무의 시선은 죽음 속에서도 여전히 그녀를 향한 시선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한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그의 욕망으로 이해하겠지만, 바로 이점이 영화를 오독하게 만드는 이유다. 단순한 욕망의 시선을 넘어서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감독은 죽음의 행렬(죽음)과 그녀에 대한 시선(열정)을 함께 놓음으로써 묘한 대조 혹은 갈등 혹은 압도하는 죽음의 분위기를 벗어나는 느낌을 연출했다.

앞서 이것은 오상무가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했다. 결론을 앞서 말한다면, 오 상무에게 아내의 죽음은 일상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화장품 계열의 대기업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그에게 일상은 늘 긴장되고 활력이 넘친다. 뜨거운 피를 끓게 만든다. 회사라는 존재 혹은 일에 대한 그의 태도를 잘 알 수 있는 장면은 평소에 전혀 화를 낼 것 같아 보이지 않은 그가 회사일로 역정을 내었던 일이다.뇌 암으로 아내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의 일상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회사와 병원을 오가는 일 때문에 더 많은 피로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전부다. 회사와 병원은 환경의 변화일 뿐 그에게는 일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상실의 예감'으로 인한 슬픔도 상실 후의 슬픔도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아내의 죽음이나 아내가 애지중지 키웠던 개의 안락사 역시 그에겐 일상에 불과하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는 상처한 사람이라고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장례를 치른 상여 행렬 속 추 대리의 모습은 죽음의 순간에도 일상을 향한 그의 열정은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내의 죽음조차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불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영화를 고려할 때, 삶과 죽음에 집착하지 않는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영화 제목 자체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화장'은 화장(化粧)과 화장(火葬)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이것은 삶과 죽음을 기의하는데, 오 상무의 일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말한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감독은 오 상무를 추 대리와 아내 사이에 놓은 것이다. 병원에서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지만, 회사에서는 여전히 업무에 열심이고 또한 추 대리에 대한 욕망의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추 대리와 특별한 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오 상무는 죽음의 분위기로 가득한 내면의 고통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그에겐 일상의 리듬에서 잠시 벗어났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일상에 대한 오 상무의 변함없는 태도를 감독은 젊고 싱싱하고 활발한 추 대리에 대한 오 상무의 시선을 통해 표현했다. 그녀를 보는 시선은 축 처질 수밖에 없는 내면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이다. 죽어가는 아내도 결코 꺼뜨릴 수 없는 일상의 생명력이다.

이렇게 단언적으로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추 대리에게서 받은 포도주에 있다. 자신이 포상으로 준 포도주를 오히려 선물로 받은 다음부터 추 대리에 대한 오 상무 태도의 변화는 확연해진다. 단지 훔쳐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음의 분위기로 가득한 병원에서 평소에 마시지 않던 포도주를 마신다. 사실 불교적인 배경의 영화라 조심스럽지만, 포도주는 기독교에서 생명을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 상무가 추 대리에게 새로운 힘을 공급받았다는 의미로 독해할 수 있다. 아내가 죽기 전에 별장으로 보낸 포도주 박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지막 가는 남편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의미가 크지만, 추 대리에게서 받은 포도주를 염두에 둔 행위다. 그러나 추 대리에 대한 오상무의 열정은 오직 아내의 장례를 마칠 때까지였다. 장례를 모두 마친 후에 별장으로까지 찾아온 추 대리를 오 상무는 의도적으로 피한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죽은 아내에 대한 예를 지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사실 추 대리에 대한 시선은 결코 욕망에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영화에선 욕망의 시선으로 비춰지긴 했어도, 그렇다고 영화의 의미를 그렇게 몰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달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일상을 가로막는 일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제는 일상을 위해 더 이상 그녀로부터 생명력을 얻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를 보는 시선은 죽음의 분위기로 가득한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오 상무의 열정이었다. 따라서 영화는 아내의 죽음조차도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길 정도로 일중독에 빠져 있는 현대인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최성수 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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