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 남았다

[ 특집 ] 4월 특집-세월호와 교회

김은혜 교수
2015년 04월 23일(목) 10:14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세월호가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한다. 억울한 죽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너무 깊은 슬픔과 너무 처절한 고통을 당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 대한 공감보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남겨진 자들에게 더 중요한 책임이다. 어떻게 차디찬 바다에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부모의 심정을 동일하게 이해하거나 느낄 수 있을까? 이러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감정적 공감보다 오히려 의식적 기억이 더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이제 진실을 침몰시킨 채 1주년을 맞이한 세월호 참상을 기억해야만 우리는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동일한 고통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며, 변화를 이끌어내고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창조하고 돌보시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 속에서 함께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세상을 꿈꾸며,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가 승리하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아야 한다. 생명의 길은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이며, 우리가 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면서 희생자 가족들이 때로는 죽음보다 더 힘겨운 삶을 이어오며, 쉼 없이 간절한 노력들을 해왔지만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실을 함께 정직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의인이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차가운 바다에 수장당한 어린 영혼들, 즉 타자의 고통에 빚짐으로써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역사를 바꾸어야 할 책임이 희생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 있는 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충만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참된 생명으로 선포하였다(요 14:6). 또한 생명의 빛(요 8:12)이신 예수는 충만한 생명(요 10:10)을 위해 오셨으며,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상처받은 연약한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 보살피며 영생의 길을 보여 주었다. 온 생명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죽음 너머 충만한 생명에 맞닿아 있다. 즉 세월호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원형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사건을 기억하는 일이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지평을 기억하도록 하는 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마지막까지 기억의 공동체로서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하고 생명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기억의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기억의 공동체'이다. 초대 교회는 카타콤의 암울함과 짙은 암흑에서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기억하고, 로마제국의 시퍼런 칼날 앞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고백했다. 십자가를 기억하며 고통당하는 자들과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부활의 소망을 갖는 것은 분명히 위험한 기억의 성례전이다. 세월호의 억울한 죽음과 그 죽음에 수반되는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기억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렇게 교회는 위험한 기억에 동참하고 그 기억을 되살리고 기념하는 기억 공동체로서 이 땅에 실현될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그 고난을 견디게 된다. 또한, 이러한 기억의 윤리는 기억을 망각하게 하고 은폐하려고 자들을 향한 구체적 실천이기도 하다.
 
즉 예수의 십자가는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고 힘이며 길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고귀한 생명들이 파괴되고 끔찍하게 처절하게 죽어가는 죽임의 현장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편의적으로 조작된 기억의 역사를 재 기술하도록 생명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 30:19 표준) 교회는 이제 이 민족이 살기 위해 영원히 살기위해 망각과 은폐의 숱한 유혹을 벗어나 그 죽임의 현장을 기억하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가 세월호 참사를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소중한 생명을 무참하게 앗아간 참사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을 다양한 논리로 비껴가고 외면했다. 한국교회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의 상실과, 생명경외의 결핍과 타자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이렇게 한국교회를 고통의 현장에서 멀어지는 망각의 자리에 서게 하였다. 이렇게 죽임의 세력 앞에 침묵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장 큰 명령인 이웃사랑의 불능자로 만들고, 시대의 고통에 가장 예민하게 응답하는 예언자의 정신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웃사랑을 행함 없이 그리고 타자에 대한 선한 삶을 전제 하지 않은 구원도 영생도 부재함을 예수는 분명하게 말한다. 세상이 아파하는데 교회가 건강할 수 없으며, 세상이 암울한데 교회가 행복할 수 없다.  더욱이 세상에 고통이 만연한데 그 고통에 응답하지 못하는 기독교가 기쁜 소식, 하늘의 위로인 복음을 전달하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교이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전환과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의 사명은 가장 시급하게 '생명'과 맞닿아 있다. 이 시대에 생명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죽임의 세력에 저항하고 복잡한 현실의 세계를 다시 보게 하고 실천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키워드이다. 생명의 원리 위에 우리는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고 세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세월호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예언자적 능력을 회복하고 그 기억공동체로서의 고통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에 기초하여 기독교 생명 공동체를 향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속에서 변화의 주체로 서는 데 실패했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공동체의 건강한 통합과 사회 공공의 선을 고양시키는 과정에서 한국개신교의의 역할 상실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교회를 고립시키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지 철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 가운데 한국교회는 이제 생명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교회의 사명을 재발견하며 동시에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복음의 전달자로서의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해야 하는 생명공동체로서 세상과의 적극적 관계정립을 요구받는 교차로에 서 있다.
 
특별히 기억의 생명공동체인 교회의 첫걸음은 고통의 현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명감수성의 회복'에 있다. 기억(rememberance)이란 비록 과거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야말로 우리가 행동하기 위해서 끌어내야 하는 결론들의 원천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기억은 진정 존경심과 올바른 마음을 지니고 고통 받은 사람들과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 관하여 '기꺼이 증언하려는 의지'이다.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공동체이며 함께 꿈꾸며 함께 그 비전을 믿음으로 공유할 때 실현된다. 분열되고 고립되고 소외되고 배제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가장 위배된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소망하고 꿈꾸는 세상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믿지 못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믿음 없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와 사회를 분리하여 안주하지 말고 겸손하게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웃들의 아픔과 고통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초월적 가치를 신뢰하지 않고서는, 현실에서 가능한 것조차 이룩할 수 없다. 단숨에 온 세상을 바꾸려는 태도는 오만이며 오산이다. 희생 없이 헌신 없이, 이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사회가 양산하는 고통과 갈등의 현장에서 매일매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생명의 가치와 동시에 그러한 고통과 갈등을 만들어내는 구조와 체제 그리고 왜곡된 가치들을 변화시켜가는 일에 희생과 헌신을 각오하고서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공동체적이다.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날마다 기도하듯, 함께 꿈꾸고 함께 일할 때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

김은혜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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