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중반 선교 상황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어린 생명들을 위한 기도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5년 04월 21일(화) 15:59

1981년 한아협이 발족된 후 우리나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74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은 554달러였다. 그런데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에는 2643달러,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는 4435달러였다. 1974년에 비해서 국민 총소득이 8배나 증가했다. 

또한 대부분의 한아협 산하시설에서 실행되는 유아교육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조선교육위원회'가 구성됐고, 1949년 교육법이 제정됐으나 한국전쟁으로 유명무실하게 됐으며 이후 정부가 몇 가지 교육시행령을 제정 공포했지만 초ㆍ중등학교 교육 재건에 몰두했기에 유아교육에는 거의 관심을 쓰지 못했다.(팽영일; 유아교육의 역사와 사상, 329~336) 

그런데 1979년부터 관련법이 개정되었다. 또한 1981년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내무부는 263개소의 시범 새마을 협동유아원을 개설했다. 농번기 상설 유아원인 농번기 탁아소도 농업진흥청에 의해서 설립 육성됐다. 1982년 3월에는 내무부에서 다양한 아동복지 시설들을 통폐합하고, 내무부 산하 새마을유아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1982년 12월 31일에 유아교육진흥법이 제정 공포됐다. 이와 같은 정책의 변화에 발맞추어 어린이집, 선교원 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던 한아협 산하시설들도 '유아원'이란 이름으로 개칭됐다. 

이런 변화와는 달리 한아협 산하시설이나 후원 요청을 해오는 시설들의 상황은 197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85년 9월 수리비용을 요청한 장안제이유아원 화장실은 재래식으로 빗물이 넘쳐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화장실도 하나뿐이어서 70여 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이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모습은 마치 KNH 후원이 처음 시작됐던 청계천 빈민촌 우세식 공동화장실과 같았다.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유아원 온돌방도 연탄불이 잘 들어오지 않아 추웠다. 유아원 관계자들은 건물을 보수하기보다는 차라리 새로 짓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한아협 임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것은 장안제이유아원의 상황만은 아니었다. 

같은 해 임원회에 도움을 요청한 다른 유아원도 60여명의 어린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하나뿐이었다. 보육시설인 구세군 후생학원에는 목욕탕 시설이 없었다. 또 다른 시설은 아이들을 하루 종일 돌보아야 하는 데도 식당 설비가 미비하여 차라리 식당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유아원인 데도 놀이시설이 없는 곳도 있었다. 

이것은 한아협 산하시설 상황만은 아니었다. 1986년에는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렸고, 많은 아시아인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 무렵 황화자 총무가 방문한 지방 상황도 한아협 산하시설 상황과 유사했다.(선교와사회복지2, 4~5) 꼬불꼬불한 산간 비포장도로 끝에 있는 화전민 마을에는 문화시설은 전혀 없었으며 어린이들의 벗은 하늘과 들판 그리고 잡초 뿐이었다. 강원도 탄광지역인 사북에서는 문을 열자 황급히 달아나는 쥐, 검게 변해버린 솜이불, 부엌에는 바가지 하나 없는 집에 사는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화성 남양만 지역 유아원에 다니다 포항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더 이상 후원을 받지 않게 되었던 어떤 아이는 빈방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정신착란을 일으켜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에는 생계를 위해 공사판과 파출부 일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황 총무는 후원아동이 이사를 가더라도 또는 더 이상 후원을 받지 않을지라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 총무의 생각에 의하면, 후원하는 사람은 돈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그 어린이의 생명을 위한 기도를 함께 보내야 했다. 이것은 KNH 설립자 보른만의 생각이기도 했고, 1983년 첫 번 한아협 지침서를 통해 강조된 KNH 루어스 총무의 주장이기도 했다.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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