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위해 기도한 독일인들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5년 04월 14일(화) 14:19

한아협이 발족되기 전에는 KNH 루어스 총무가 직접 우리나라에 와서 청계천, 남양만, 동인천, 성남 등 시설들을 둘러보고 후원을 결정했다. 구세군 시설 후원 역시 KNH 루어스 총무와 사령관과의 만남과 그 때를 같이했다. 그러나 1985년 회원교단이 된 기독교대한 감리회 관계자와 KNH의 접촉은 1987년 5월 KNH회장 케일링 박사가 사회선교 국장을 만남으로 이뤄졌다. 그러므로 한아협 발족 전에는 KNH 관계자가 직접 방문한 후에 후원을 결정했고, 발족 후에는 방문이나 만남보다 한아협 운영위원회 결정에 따른 후원이 먼저 실행됐다. 

한아협 발족 후 조직이 정비되지 못하고 있을 때, 1984년 루어스 총무가 방한했고, 이를 기점으로 임원회와 총회가 활성화됐다. 1985년에는 한아협 산하시설 평가와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산하시설 조사를 요청함으로 한아협의 정책과 방향 설정을 도왔다. 

KNH 회장이나 루어스 총무 또는 아시아 담당간사인 마테우스가 1973년부터 일 년에 한 두 번 또는 격년에 한 번씩 방한해 한아협과 산하시설 운영을 살폈다. 또한 매년 각 시설 보고와 후원 아동의 편지와 한아협의 총회록과 회계보고를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마테우스는 1990년 발리에서 열린 KNH 아시아지역 자문회의에서 공인회계감사를 받도록 한아협에 제안했다. 이를 통해 결연 아동들과 시설들이 후원자와 원활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었으며, 조직적인 행정과 투명한 재무 구조가 확립됐고, KNH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KNH와 한아협의 선교협력 관계는 문서나 한아협 행정 관리 감독에만 국한됐던 것은 아니었다. 관계자가 방한했을 때는 산하시설 시설장들의 모임이 열렸고, 이 모임을 통해 현장의 소리와 KNH의 정책과 방향이 교류됐다. 이들은 또 산하시설을 방문하여 현장 활동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마테우스는 88년 5월 3주간 동안, 89년 7월 한 주간 동안 한아협 산하시설들을 방문했다. 이때 KNH에서는 올림픽 개최 등 경제적인 발전으로 한국 후원 중단이 고려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테우스는 현장 방문을 통해 그와 전혀 다른 상황을 보았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아동들, 특히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근로 청소년들을 돕겠다고 했다. 이렇듯 KNH 관계자들은 현장 방문을 통해 오류를 발견하고 조정하기도 했다. 

한아협과 KNH 관계가 사무 행정적인 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2대 운영위원장 이국선 목사가 1986년 10월 심장질환으로 별세했을 때 KNH 독일 본부에서 조전과 조화 보내 조의를 표하며 슬픔을 같이 나누었다. 또한 1986년 12월 KNH 총무 루어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10월에 회갑을 맞은 그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날 한아협 산하시설 시설장들과 교사들, 그리고 운영위원들이 도화은석 유아원에 모두 모여 한아협 가족의 날로 지냈다. 

한아협과 KNH의 관계는 독일 후원자들과 한아협의 관계로도 발전되었다. KNH를 통한 한아협 후원자들은 별도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후원아동들이 보낸 편지를 소중히 간직했으며 후원아동의 가정생활은 물론 생일이 언제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한아협과 한아협 산하시설들은 독일 KNH의 점검과 관리를 통해 행정적으로 정비되고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들은 또 KNH 후원자들과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디아코니아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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