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만어린이집 운영위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5년 04월 14일(화) 13:48

독일 아동후원단체 KNH의 지원이 시작된 지 6년 정도 지나자 KNH 후원을 받는 시설들의 수가 점차 많아졌다. 후원받는 아동들도 1974년에는 200명이었는데, 1979년에는 658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각 시설들은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후원받는 시설이 남양만 한 지역에 몰려있을 때에는 KNH 후원과 관련된 일들이 즉각적으로 의논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변화가 요청되고 있었다. 

1980년, KNH 후원을 받는 국내 시설들은 10여 개나 되었다. 그 시설들이 있는 위치 또한 화성군 남양만 간척지 뿐 아니라 인천, 제주, 성남 등지로 넓게 퍼져 있었다. 이들이 속한 교단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둘이 되었다. KNH 후원이 처음 전해졌던 청계천사람들의 정착지 남양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진홍 목사는 '한쪽 손은 교회, 다른 한쪽은 지역사회, 합쳐서 지역사회 선교'(김진홍 목사 면담, 2014. 5. 29)라는 이론을 남양만 각 지역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KNH 후원을 근간으로 하여 남양만 6개 지역에 다목적센터가 설립되었고 지역사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지역사회 선교활동은 매우 다양해졌다. 다양한 활동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왔고, 이 모든 활동을 이끌던 김진홍 목사는 1979년 12월 활빈교회를 휴직하였다. 어린이집 교사들의 이동도 매우 잦았다. 탁아사업이 위태로워졌다. 농민들과 도시 빈민 자녀들을 위한 따뜻한 식사와 교사 인건비를 지원하던 KNH 후원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했다. 

남양만 지역 탁아사업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불모지라고 생각했던 도시 저변 노동자들에 대한 선교 특히 농촌선교활동에, 최근 한국에서 탁아소 활동을 가장 효과적인 매개 수단으로 채택하기 시작한 것은 활빈교회의 성공을 본받았기 때문"(밀알회 회보 13호, 4)이라고 노무라 목사는 평했다. 탁아사업이 중단되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1980년 남양만 6개 어린이집들과 교회 봉사자들은 남양만지역 어린이집 운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장안 6리 교회 담임목사와 어린이집 시설장을 맡고 있던 김종남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이 위원회 위원은 황화자 전도사를 포함해 13명 이었다.(밀알회보 13호, 19) 예장 통합 이의호 총무가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사무실은 독정리 어린이집에 두었으며, 운영위원들은 함께 모여 남양만 지역 어린이집 운영을 의논하였다. 남양만 지역 6개 어린이집들도 나름대로 각 지역에서 좋은 성과를 냈다. 노무라 목사는 통역을 담당하면서 탁아소운영과 교사교육, 탁아소 어머니교육 프로그램들을 돕던 황화자 전도사에게 남양만 탁아사업 책임자가 되어달라고 강권하였다. 동시에 KNH 루어스 총무에게 황화자 전도사를 책임자로 세우도록 강하게 추천했다. 당시 노무라 목사는 홍콩 슬럼가 방문이나 필리핀 탁아소 건립지 예비 조사 등을 자비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KNH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노무라 목사 이메일 면담, 2014. 10.9) 이후 노무라 목사는 황화자 전도사와 우리나라 각지를 둘러보고 KNH에 우리나라 상황을 보고했다.

그 결과 1980년 6월 황화자 전도사는 조정관으로써 남양만 지역 6개 어린이집들과 독일 KNH 교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독정어린이집 사무실을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KNH 후원사업은 어린이 사역에 중점을 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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