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 공부방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5년 04월 14일(화) 13:28

남양만 지역 어린이집을 돕던 KNH 루어스 총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외에 다른 교단 탁아사업도 돕고 싶어 했다. 김진홍 전도사는 197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이국선 목사를 KNH에 소개하였다.(김진홍목사 면담, 2014. 5. 29) 이국선 목사는 1947년에 월남해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전남 완도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10년 정도 지났을 때 천우사 사장 전태관 장로가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래서 이국선 목사는 1963년에 대성목재에서 산업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1967년 인천시 송림동 253번지 30평 건물을 빌렸다. 그리고 동인천도시산업선교센터라고 이름 붙였다. 이국선 목사는 이곳에서 근로자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이국선 목사의 산업선교는 복지 중심이었다. 그는 근로자들의 복지 프로그램 중 하나로 탁아소를 설립 운영했다.

이 마을은 인천의 대표적인 쪽방촌이었다. 동인천도시산업선교센터가 건립될 당시 괭이부리 마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맞벌이를 하는 공장 근로자들이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 은석유아원이 세워졌다. 이 유아원에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원훈으로 삼아 어린이들을 통하여 이웃에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업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목사가 개인적으로 산업선교센터를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웠지만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유아원은 그 지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15년 정도 지나면서 운영이 무척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KNH와 연결이 됐고, 1977년부터 후원을 받았다. 

센터 근처에서 과일 장사를 하던 한 사람의 요청에 의해 '학생의 집'도 시작됐다. 그는 약간 장애가 있는 한 아이의 점심을 부탁했는데, 그의 부탁에 따라 점심을 제공하려다 보니 점심을 먹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아이는 그 아이만은 아니었다. 이들을 위해 유아원 연장 프로그램이 기획됐다. 1978년 10월부터 KNH에서 이 프로그램도 지원해 주었다. 지하실에 방이 만들어졌고, 어린이집 졸업생들 중 점심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점심식사가 제공됐다. 공부도 도와주었다. 학생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져서 100~110명 정도 되었다. 지하실에 방 3개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지하에는 햇빛이 들지 않았다. 이명숙 원장은 이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이 햇빛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80년 KNH 루어스 총무가 산업센터를 방문했다. 건축할 땅이 마련된다면 건축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국선 목사는 살고 있던 집을 팔아 건축할 땅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학생의 집이 건축됐다. 이보다 먼저 1978년 도화은석유아원이 설립되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공장근로자였다. 그들은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일을 했다. 도화 은석유아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주고 5개 영역발달을 위한 교육과 건전한 사고방식을 심어주는데 노력하며 아이들의 영양공급에도 노력했다. KNH 후원을 받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후원을 받는 동안 유아원에는 원아들의 사진이 첨부된 개인카드가 비치되었다. 1980년 은석 어린이 집을 방문한 KNH 총무 루어스씨는 이것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굉장히 만족스러워 했으며 다른 시설장들에게 참관해보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KNH 후원을 받는 시설들은 서로 연락을 하며 정보를 교류하기 시작했다.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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