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 성서마당 ]

차정식 교수
2015년 04월 14일(화) 13:24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학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이라는 뚜렷한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예수는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다. 과부는 구약성서 이래 고아와 함께 사회 경제적 약자의 대명사이다. 그녀에게는 원수가 있었고 그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녀가 살던 그 도시의 재판장에게 그 원한을 풀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무뢰한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집요하게 그에게 찾아가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하소연했고, 그 재판장은 의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귀찮게 하는 그녀의 저돌적 채근이 부담스러워 그 소청을 들어주었다는 얘기다. 이루기 어려운 소원을 이루게 된 과부의 극적인 반전이 결말에 확인되지만 이 비유는 그 반전의 묘미를 강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비유는 극단의 부정적인 사례에 빗대어 극단의 긍정적인 사례를 교훈하는 수사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자세와 꾸준한 신앙의 근기를 교훈한다. 그토록 건방진 재판장도 자기가 귀찮아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신실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님이 그 자녀가 부르짖는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비유가 죽자 사자 매달리며 떼를 쓰는 식의 '강청기도' 자체를 부각시키려는 것 같지 않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이렇게 꾸준히 집중하여 기도하는 근거는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숱하게 장애물에 부대끼며 낙심하기 쉬운 제자도의 삶을 꿋꿋이 견뎌내는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도의 원통한 사연에 신속히 응답하여 공의로운 신원의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종말론적 확신을 심어주는 데 메시지의 핵심이 놓여 있다. 

오늘날 신앙이 교양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인간의 끈끈한 욕망의 세계를 세밀하게 통찰하여 그 욕망의 좌절로 인한 자신과 뭇 인간의 상처와 왜곡된 심리를 꿰뚫어볼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변덕과 경솔한 망각으로 들쭉날쭉 하는 신앙의 파행을 방어하려면 투박한 듯한 이 과부의 집중력과 결기를 배워 그 가운데 꿋꿋한 용기와 담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 주변에 억울한 상처가 널려 있고, 왜곡된 상처는 강박된 심리를 낳아 그것이 특정 사안에 결부될 때마다 교회 안팎을 자주 어지럽힌다. 제대로 갈무리되지 않은 그 개인적 사회적 병통의 결국은 좌절과 낙담이다. 그것이 우울증으로 쉽게 번지고 절망으로 악화된다. 그리고 절망의 끝은 죽음이다. 단 한 번의 그 치명적 결락이 우리를 낙심시켜 아흔아홉 번의 은혜 받은 기억을 말아먹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며 근신 중에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이 즉흥적 열정으로 부나방의 날갯짓처럼 파닥거리다가 시들해지지 않으려면 공의로운 심판을 기대하며 기도로 꿋꿋이 견디는 믿음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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