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폭력을 치유하라 (3)폭력, 치유할 수 있다

[ 특집 ]

오상렬 목사
2015년 04월 14일(화) 11:57

오상렬 목사
기독교평화센터 소장

최근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원생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른 일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폭력의 강도와 내성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특별히 이 어린이집에서 발생한 폭력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더욱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교사가 폭력을 가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폭력의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예전의 폭력이 학교폭력과 군대폭력 등 한국사회의 한 영역에서 발생한 문제라면 최근 일어나는 폭력은 한국 사회 전체가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마치 전쟁의 상태로 돌입한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한다. 전쟁은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상태인데,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폭력의 문제는 깊고 광범위하며 무차별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우리 사회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나 지금의 상태라면 해답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한국사회의 일원인 한국교회가 현 상태에서 한국사회 폭력의 치유자 혹은 해결사가 될 수는 없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이처럼 폭력이 내성화되고 심각해진 것은 교회가 폭력에 무관심하거나, 방기 또는 일조한 점도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반성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할 첫 번째 일이다. 즉 우리는 폭력 문제에 대한 해결사가 아니라 오히려 폭력 문제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내부 문제에 대해서조차 평화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자신의 갈등이나 문제조차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서 어떻게 사회의 갈등이나 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전제하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평화는 복음의 핵심이며 평화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임을 인식해야 한다.

평화가 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요한 영역이 되지 않을까? 평화는 복음의 차원보다 윤리적 차원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화와 화해는 실천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평화와 폭력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평화의 중심점이다. 예수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자들의 용서를 빌면서 십자가에서 죽어갔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회복하고, 또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평화와 화해는 복음의 핵심이며, 교회는 이러한 복음의 기초 위에서 세워졌고 결국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평화 사역의 결과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는데, 그 순서가 중요하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두 번째 움직임은 사람들인데, 첫 번째 움직임에 의해서 시작됐다. 평화는 하나님의 비전이다. 깨어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평화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더욱 예리하게 키우고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지식과 능력, 태도를 배워야 한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학교에서 신앙교육과 더불어 평화교육이 필요하다.

둘째, 내면과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시작해 관계와 구조의 평화로까지 평화의 차원을 확대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의 폭력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방기하게 된 것은 평화를 내면과 하나님과의 평화만으로 축소했기 때문이다. 내면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평화의 여러 차원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데, 그 차원을 축소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평화를 내면과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출발하여 관계의 평화, 구조의 평화로 확대하여야 한다. 

특별히 1대 99의 사회로 양극화되는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 속에서 앞으로 폭력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폭력을 양산하는 구조의 문제를 배제해놓고 주로 자선과 구호차원의 해결책에 주력한다면 약자들의 희생을 방치하는 꼴이 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빵을 주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 한다."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은 눈에 금방 드러나지만 구조적 폭력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접근이 어렵다. 또한 구조적 폭력은 사회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방치하고서 한국사회에서 평화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땜질 처방에 불과한 것이다.  

셋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와 함께 폭력의 희생자들과 연대가 필요하다.
성서는 일관되게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조한다. 사회적 약자들은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들을 보호할 힘이 없기에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 따라서 권력자들과 사회적 약자 사이에 기계적 중립을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폭력이 되기 쉽다. 이런 면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에 대해 교회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가는 경찰, 군대, 행정 등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반면 한 개인은 그러한 국가 앞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속성 그 자체로 인해 히틀러 정권의 독일국가의 예에서 보듯이 국가는 견제와 감시가 없으면 언제든지 폭력의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교회는 늘 경계해야 한다. 제주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과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분쟁과 폭력의 문제는 지난 몇 년간 한국사회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제주 강정의 예에서 보듯이 정말로 국가안보를 위해서 군사기지가 필요했다면 몇 년에 걸쳐서라도 주민들을 설득하고 끈질긴 협상을 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십년이 넘게 긴장과 갈등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역주민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에 대한 신뢰도 하락과 기지 건설 지연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다.

또한 교회는 폭력의 희생자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는 많은 경우 폭력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차별을 받고 사회적인 멸시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교회가 폭력의 희생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폭력의 악순환을 막는 지름길이다.  

깨어지고 폭력이 난무한 세상 가운데서 평화를 만드는 일은 단기적인 이벤트나 프로그램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단계와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 일을 위해서 깊은 회심과 평화교육에 대한 투자, 평화를 향한 모험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만일 이렇게 여정으로서의 평화를 시작하고 교회의 본질인 평화교회를 회복한다면 그 때서야 한국사회 폭력극복을 위한 작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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