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4월 13~18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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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08일(수) 16:53

월-격려해 주시는 하나님
본문 : 수 1:1~5
찬송 : 438장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종이었던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하셨을까? 모세가 죽은 후 3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가야 하는 여호수아의 마음은 어땠을까? 여호수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직무를 위임 받고 힘들어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군대가 없다.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군대와 요새로 되어 있는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과 근심 두려움이 앞섰다. 이때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며 여호수아를 격려하신다.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 했다. 모세의 보좌관이었던 여호수아였다. 여호수아에게 있어서 모세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껏 모세가 명한대로만 하면 됐는데 이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다. 이제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장정만 60만 명, 아이들까지 모두 합하여 300만 명에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가야 한다.
 
'모세도 못한 가나안 정복을 어떻게 내가 감당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여호수아는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두렵고 떨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너는 일어나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자신이 없어 주저 앉아 있는 여호수아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너는 일어나 이스라엘과 더불어 요단을 건너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라'고 하신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으니 일어나 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힘과 격려를 주신다. 감당케 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다.
 
격려가 무엇인가? 용기나 힘을 북돋아 준다란 뜻이다. 격려는 '삶에 동력을 주는 에너지원'이다. 하나님은 격려의 말씀을 계속 하셨다. "그 땅을 차지하게 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대적할 자 없을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한 것처럼 너와 함께하여 주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 너는 형통할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이 세상에서 격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격려가 필요하다. 연약하기에 더 격려가 필요하다. 잘못하기에 더 격려가 필요하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격려해 주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격려자가 되어 주신다.
 
모세가 떠난 후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여호수아는 강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백만 군대를 얻은 것 같이 든든하였다. 예수님을 주로 믿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승리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격려로 우리는 오늘도 세상을 이기며 강하고 담대히 살아갈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주의 말씀과 권능을 힘입어 강하고 담대함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원범 목사
복음의빛교회


화-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본문 : 엡 5:15~18
찬송 : 191장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가장 행복한 명령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명령이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성도들을 향한 명령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고, 누구라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보다 성도에게 더 좋은 축복의 말은 없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생명력 넘치는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령 하면 능력이나 은사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이신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령의 모든 사역은 진리이신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다. 성령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 질수록 더 예수님을 알게 된다. 성령 충만할수록 더 예수님을 사모하게 된다. 성령 충만할수록 더 예수님과 친밀해지게 된다. 성령 충만할수록 더 예수님을 닮아 가게 된다. 성령 충만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충만이다. 예수님으로 충만해져서 날마다 24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성령 충만이다. 성령 충만은 오직 예수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삶이다. 성령 충만은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주인 되셔서 사는 삶이다(갈 2:20).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 속에는 2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 명령형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을 향하신 명령인 동시에 바로 나를 향하신 명령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순종해야 한다. 미룰 일이 아니다. 그동안 성령 충만하지 못했다면 회개하고 사모해야 한다.
 
둘째, 현재형이다. 계속적인 명령이다. 날마다 매일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다. 옛날에 한번 성령 충만 했던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다시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이다. 마귀는 오늘 성령 충만한 성도를 겁낸다. 성령 충만 받으라는 말은 마치 휴대폰 배터리를 매일 충전하듯이 성령의 능력으로 매일 영적 충전을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과 날마다 행복한 동행을 하기를 원한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과 행복한 동행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화섭 목사
칠성교회


수-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본문 : 합 2:1~8
찬송 : 388장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직후 하바국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동시대에 사역했던 선지자가 예레미야이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침공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이런 불안을 이기려고 우상을 더 찾았다.
 
남유다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자 감옥에 가두었다. 하바국 선지자는 이 같은 유다의 죄악을 보면서 "하나님,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찾고 의인을 핍박하는데도 왜 잠잠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하나님께서 "범보다 사납고 독수리처럼 움켜쥘 갈대아(바벨론) 사람을 일으켜 유다를 심판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선지자 하박국이 "유다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선민을 어찌 악한 갈대아인을 들어 심판하십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하나님의 답변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의인은 바벨론 군대가 무자비하게 공격할지라도 우상을 찾거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 궁리를 찾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을 따르는 자라는 것이다. 악인은 이 같은 상황을 맞으면 믿음을 버리고 피할 길을 찾는다. 그러나 의인은 환란을 맞으면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회개할 것을 찾는다. 하나님을 더 의지한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고서 이제 내게도 후계자가 있다고 안심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은 네 후계자가 아니다. 사라에 몸에서 난자가 후계자다"라고 하시자 "사라가 90세나 되었으니 아이를 낳을 수 없지 않습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고 하시자 "아멘"하였다. 로마서 4장 3절은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다.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다.
 
나라를 잃는 비극 가운데서도 범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 모르드개와 에스더 같은 이들이 의인이다. 비록 소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소수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셨다. 의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이 더더욱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그 의인이 되도록 힘쓰자.
 
오늘의 기도
 
주님, 항상 의인답게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을 주소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민기태 목사
동문교회


목-아브라함에게 감동하신 하나님
본문 : 창 22:1~19
찬송 : 455장

드라마나 영화처럼 인생에도 최대의 위기가 있다. 아브라함에게 최고의 위기가 닥쳐왔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100세에 얻은 아들이다. 이 아들을 얻기 위해서 25년을 기다렸다. 왜 하나님은 이런 요구를 하셨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시험의 목적이 두 가지다.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 있고, 확인하고 싶은 시험이 있다. 그렇게 믿고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시험이 있다. 마귀는 떨어뜨리기 위해서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확인하고 싶어서 시험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믿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이삭은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래서 이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비웃음이 웃음으로 된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지만 순종하기로 했다. 3절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고 나온다. 어제 밤에 잠을 잤을까? 어느 부모가 잠이 오겠는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브라함이 밤새도록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결론적으로 순종했다. 갈등이 순종으로 결론 내리는 것이 진짜 신앙이다. 특히 아브라함은 3일 동안 길을 갔다. 3일 동안 길을 가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도망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순종하였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삭 또한 순종했다. 이삭은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하신다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그대로 순종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진짜 신앙교육이다. 부모가 손해 보면서 지키는 것을 봐야 주일 성수가 교육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도 십일조 하는 것을 봐야 십일조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봐야 자녀도 그렇게 한다.
 
이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마쳤다. 이제 비장한 마음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이삭을 향해 내리치려고 힘을 주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급하게 부르셨다. 얼마나 급하셨는지 두 번씩이나 부르셨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감격하시는 목소리로 "정말로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한 숫양을 보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이삭을 보시면서 얼마나 감격하셨겠는가?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껏 축복하셨다.
 
오늘의 기도
 
순종할 수 없을 때 순종하여 하나님이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재전 목사
청강교회


금-보호자
본문 : 롬 16:1~2
찬송 : 208장

로마서 16장은 사도 바울이 인사를 하고 문안을 하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많은 사람에게 문안을 하는 중에 제일 먼저 뵈뵈라고 하는 여인을 추천하는데,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집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뵈뵈 집사를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뵈뵈가 "여러 사람과 나(바울)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뵈뵈 집사는 사도 바울의 보호자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이 쓰여진 헬라어에서 '보호자'라는 단어는 '프로스타티스'이다. 이는 '앞에 서는 자'라는 뜻이다. 뵈뵈 집사가 사도 바울과 여러 사람(선교 동역자)의 보호자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본문 1절에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겐그레아에서 사도 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보호자가 필요했을까? 사도행전 18장 18절에 보면 바울 사도가 머리를 깍았다고 했다. 서원이 있었다고 했는데 어떤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때 뵈뵈 집사가 '보호자'로서 '앞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서신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먼저 그에게 나타난 위기는 '사도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님 살아계실 때에 한번도 뵌 적이 없고 개인적 신비 체험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난 것 뿐이라는 것이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따라서 겐그레아 교회에서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바울이 어찌 사도가 될 수 있냐고 시비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때 뵈뵈 집사가 교인들 앞에 서서 그의 사도권 문제를 해결해 주므로서 사도 바울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직접 변증하고 있다. 
 
둘째로 겐그레아 교회에서 있음직한 문제는 질병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있었다. 흔히 이것을 심각한 눈병, 치명적인 말라리아라고 해석하는데 근래에는 간질병이라고 보는 신학자도 있다. 이런 문제가 겐그레아에서 생겼을 것이다. 이 때 뵈뵈 집사가 앞에 서 있으므로 보호자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은 자기를 보호해 준 뵈뵈 집사가 얼마나 고맙겠는가?
 
뵈뵈는 비록 집사(일꾼)였으나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임이 분명하다(마 10:41).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와 사역자의 보호자가 되어 기도와 사랑과 관심과 보살핌으로 선지자의 상을 받기를 기원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나를 통해 우리 교회가 내 주변의 사역자들이 힘을 얻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문재용 목사
선목교회


토-삶속에서 마라를 만났을 때
본문 : 출 15:22~27
찬송 : 75장

430년만에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3일 동안을 수르 광야를 지나게 되지만 그곳은 사막인지라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곳에 이르러 물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물은 써서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물을 '마라'라고 하였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 '쓰리다' '애달프다' 등의 뜻이 다.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마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 세상은 마라와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너무나 많은 마라가 있다. 예기치 못한 어려움과 아픔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신자라는 이름 때문에 손해보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신앙으로 잘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둘째, 쓴 물을 달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나무를 던지므로 쓴 물이 달게 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그 나무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무였다. 실패한 인생을 구원할 나무는 예수님이 생명을 걸었던 십자가 밖에 없다. 왜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실패하는 걸까? 그것은 십자가가 안 보이기 때문이요, 십자가를 버렸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에게 종종 마라(고통, 고난)를 두신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괴롭게 하시려고 주신 고통이 아니라 축복을 위해서 주신 고난이다. 괴로움 중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면 예비된 축복이 내 것이 된다.
 
넷째, 하나님은 마라의 고통 후에 엘림의 축복을 주셨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엘림이 있다. 하나님께서 더위나 목마름의 염려가 없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엘림은 어디일까? 교회이다. 교회에는 영혼의 생수인 예수님이 계신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샘솟는다. 모든 믿는 자를 위한 십자가 그늘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식과 샘솟는 축복을 위해 예수님의 핏값으로 광야 같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셨다. 마라와 같은 세상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자.

오늘의 기도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바라보며 인내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배춘화 목사
풍성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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