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바보그(하나님께 영광을)'!

[ 기고 ] 러시아 선교 회상 <상>

유양업
2015년 03월 24일(화) 15:25

대전노회 문전섭 목사(은퇴)의 아내 유양업 선교사의 선교 회고담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 문전섭ㆍ유양업 선교사는 1994년부터 약 3년 6개월간 러시아 선교를 했으며, 현재 은퇴 후 전라도 광주에 거주하고 있다.

   
▲ 1994년 모스크바에서 문접섭 목사와 부인 유양업 선교사.
북방의 문이 열리자 반공사상으로 교육을 받았던 남편과 나는 선교를 위하여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가게 됐다.

자녀들이 모두 학생들이고 더구나 막내가 고 2여서 엄마가 꼭 필요할 때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에 자녀들이 "우리는 다 컸으니까 가셔서 선교해야지요, 염려 마세요"라고 말했지만 마음은 몹시 아팠다.

유난히 춥던 1994년 1월 6일 나의 생일에 남편과 나는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의 착륙과 동시에 승객들은 환호의 박수를 힘있게 쳤다. 러시아인들은 비행기가 뜨거나 착륙할 때 박수치는 것이 관례인 것 같았다. 공항은 초라했다.

숙소를 향하여 가는데 국경일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축포소리와 함께 불빛들이 요란했다. "우리가 온 것을 환영하네요"라고 말하며 우리는 서로 보고 웃었다. 밝게 반짝이는 불빛은 캄캄한 러시아 밤 하늘을 곱게 수놓았다.

우리는 임시로 학교 건물 5층에서 유숙했고 강의실은 1층에 있었다. 이미 뽑아놓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통역은 '뽈리나' 여사가 맡았다. 그녀는 고려인으로 튼실한 체구에 매력 있는 음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 시간에 인사말이라도 노어로 할까?'하여 '즈드랏스부이째?(안녕하십니까?)'를 열심히 연습했다. 그런데 막상 학생들 앞에서 노어 인사말을 하려고 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고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엉겁결에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하니 뽈리나가 받아서 "즈드랏스부이째"라고 통역했다. 기억력 없는 머리를 탓하면서 나도 따라서 어색하게 "즈드랏스부이째"하고 흉내를 내니 학생들도 재미있는 듯 "와!"하고 모두 웃으면서 "즈드랏스부이째" 하고 힘차게 화답을 했다.

학생들이 내 이름을 발음하기가 어렵다고 하며, '양(yang)'자를 'g'자만 'a'자로 바꾸어 '야나(yana)'라고 지어 주었다. 이것이 나의 닉네임이 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뽈리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북한 휴전협정 때 북한의 대표였다고 했다. 그녀는 공산치하의 교육을 받아서 기독교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똑똑하고 명민하여 통역일을 곧잘 했다. 그 일을 하면서 자연히 성경과 신학을 접하게 되어 나중에는 목사가 되었다.

학교의 직원들은 뽈리나 외에 고려인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그때는 과도기여서 생활이 어려웠다. 그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같은 동족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생활에 도움이 될까하여 돈 벌이에 관심도 있어 열심히 잘 도와주었다.

소련연방은 지구전체의 6분의 1의 면적을 가졌는데 공산정권(1917-1991)이 무너짐과 동시에 15개 나라로 나눠졌다. 그중 러시아는 지구 전체의 8분의1 크기의 땅을 가졌고 유라시아라고 일컫는데, 하바로브스크와 블라디보스톡은 아시아에 속하고,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유럽에 속했다. 모스크바에서 하바로브스크나 블라디보스톡을 가려면 비행기로 8시간 정도 걸린다. 이렇게 광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단지 1억4천여 명의 적은 수였다.

'니나'는 일반대학의 교수로서 미모도 아름다운 인텔리전트 여성이었다. 우리에게 잠시 동안 노어를 가르쳐 주었다. 공부를 하면서, 영어 '캐릭터(characterㆍ성격)'를 노어로 '하락제르'라고 했다. 그때 나는 그럼, "러시아인의 하락제르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교수는 잠간 머뭇거리다가 대답하기를 "천진성"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무섭게만 여겨졌던 러시아인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성이 부드럽고 순진하고 친절했다. 길에서 서로 스쳐갈 때도 미소를 지으며, "슬라바보그"하고 지나갔다. 직역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인데 가벼운 인사말로 사용한다. 러시아인의 삶의 저변에는 기독교 정신이 깔려 있는것 같았다. 9세기경에 왕이 종교를 택하기 위해 사절단을 외국으로 보내어 살펴보게 했는데, 사절들은 정교회 예배의식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왕께 보고했고, 왕은 흔쾌히 받아들여서 이때부터 정교회는 1917년 공산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약 천년 동안 국교가 되어왔다.

공산당 치하에서는 정교회가 박해를 받았고, 74년 동안 활동도 금지되어 아름답고 화려한 교회당들이 폐허가 되고 다른 용도로 쓰기도 했다. 1991년 공산당이 무너지면서 교회도 다시 회복되어 활기를 띠었다. 이때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어, 한국의 선교사들은 교회 및 신학교 설립, 병원사역, 찬양대의 미국 순회공연 등의 활동은 괄목할만했다.

유양업 / 전 선교사ㆍ시인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