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월 23~28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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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19일(목) 15:37

월-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본문 : 마 6:10
찬송 : 185장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뜻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는지 생각해 보자.

첫째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뜻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영에 이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살리시고 내주하시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세상을 책망하실 것(요16:8)"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가시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영 안에 임했다는 증거이다. 믿음도 성령의 은사(선물)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라는 의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님, 즉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영이(하늘) 살아나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신앙과 비례하여 확장되어 간다.
 
셋째로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영)안에서만 이루어져 만족하는 상태에 있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할 뜻을 계획하시고 그 뜻을 땅에서 이루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뜻을 이루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영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우리의 혼과 육(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까지 지배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웃과 세계로 확장되어 나가기를 바라시는 기도이다.
 
사람을 영, 혼, 육으로 구분한다. 육은 첫 번째 하늘로, 혼은 두 번째 하늘로, 영은 세 번째 하늘에 비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무소부재 하시어 어디든지 가실 수 있고 어디든 계신다. 그러나 악한 영인 사단이나 귀신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만 드나들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은 거룩한 곳이기에 감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응용하면, 악한 영은 우리의 육과(육체), 혼(정신, 마음)까지는 들어 올 수 있지만, 우리의 영의 자리에는 거룩하신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들어 올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영에서 확장되어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영숙 목사
장암교회


화-충성,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본문 : 눅 16:10~13
찬송 : 324장

오늘 본문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재물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다가 들통나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는데 그 때 일종의 파면 후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자신의 권한으로 탕감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월권으로 빚을 탕감해주고선, 자신이 파면 당한 후 그 빚진 자들로부터 영접을 받겠다는 계획이었다. 불의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 불의한 청지기를 본받으라고 하신다. 불의한 재물이라도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어 훗날을 도모하는 지혜와 최선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이처럼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 불의한 재물이라도 지혜롭게 사용하는데,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받은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물으신다.
 
빛의 자녀인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활용 가능한 재물, 혹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충성되게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의 가치를 알고서 신실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스쳐 지나가듯 기도한 것 조차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흥얼거리며 읊은 찬양소리 조차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 충성되게 사용하는 것의 시작이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할 자원을 얼마나 받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작은일에 충성하는 것,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도 선한 일을 만들어 내는 것,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삶속에 누가 참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할 것이 이 세상에 있기는 있는 것인가? 재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하나님만이 내 삶 가운데 참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 할 수만 있다면. "내 모든것을 하나님께 신실하게 드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이 내 곁에 남아계신다면 우리는 온 우주를 갖게 된 것이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충성되고 신실하게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문제가 정리가 된다면,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 모든 것을 신실하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물질과 그 어떤것이라도 충성되게 드릴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주 목사
대구남덕교회


수-사랑은 섬김입니다
본문 : 막 10:41~45
찬송 : 80장

흙은 무생물 같지만 씨앗이 내리면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게 한다. 이것이 섬김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 발걸음은 죽으러 가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매우 심각하고 어두운 상황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생뚱맞은 요구를 한다. "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우리를 출세시켜 주십시오. 명예를 높여주십시오." 이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첫째,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신다. 인간의 욕구중에 명예욕이 가장 치열하다. 어느 사회, 공동체, 교회 할 것 없이 갈등이 있는 배후에는 명예욕이 숨겨져 있다. 크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권력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인간의 영원한 구원의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섬김으로 영원한 기쁨을 회복시키려 오셨다. 이것이 크게 되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매뉴얼이다.
 
아담과 하와는 조성과정이 달랐다.  하와는 뼈로 만들어 튼튼하고 힘이 있어 아담을 돕는 배필이 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골육관계라고 한다. 가장 소중하고 완벽한 몸을 이루는 데도 섬김의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둘 사이에 섬김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다. 다스리는 관계, 지배의 관계가 되었다. 섬김은 하나님 사랑의 질서이다. 이것을 회복시키려 우리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범을 보여주셨다.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시면서 아이 메세지(I-Message)를 주셨다.
 
둘째,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 하신다. 3년 동안의 동고동락한 형제지간 같은 제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자기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들의 속마음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나 비극적 인간에게 구원의 표를 주어 안심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표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셋째, 내가 온 것은 섬기려 왔다 하신다. 사랑은 관계 속에서 확인된다. 나와의 관계가 좋아야 건강하다. 너와의 관계가 원할해야 행복하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부드러워야 평안하다. 이를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한다. 또한 우리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야 너희에게 유익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죽음으로 우리를 섬기셨다.
 
사랑은 섬김이다.
 
오늘의 기도
 
으뜸이 되고자 하는 내 안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말씀이 승리케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인규 목사
대전충현교회


목-하나님께로 돌이킨 자의 삶
본문 : 겔 33:14~16
찬송 : 269장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을 나간 자식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로 이어진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면서 당신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장 기쁜 소식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당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본문은 사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라도 죄인들의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기에 충분함을 말하면서 회심하고 돌이킨 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켜 주고 있다.
 
첫째로, 죄를 떠나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생명적인 연합을 거부하고 자기를 스스로 주인 삼으며 최고의 가치를 자신의 행복에 두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은 바로 이 죄를 떠난다는 것이다. 진정한 회심의 열매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죄를 사랑함은 곧 죄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는 자기에 대한 사랑이고, 회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만족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다. 회심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미워하고 그 죄를 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둘째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그 사람의 회심이 진실하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킨 그는 정직하고 공정하며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신자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정직한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불이익도 당해야한다.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한 것이라면 외톨이가 되어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책임감 때문에 그런 삶을 살 수는 없다. 실제로 그렇게 행하면서 사는 것에는 피나는 고통과 불편이 따른다. 그러한 삶의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그 삶의 기준은 율법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켜 달라고 아무리 펑펑 울면서 기도할지라도 동시에 이러한 기도의 진실함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드러내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자비를 베푸는 삶이다.
 
저당물은 돈을 빌려 주는 대신 저당으로 잡은 물건을 뜻하고, 강탈한 물건은 우월한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법적으로 빼앗아온 물건을 가르킨다. 강탈한 물건은 돌려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당물은 합법적으로 받은 물건이니 돌려주지 않아도 될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은 "저당물을 도로 주라"며 이것이 회심한 사람의 삶이라 한다. 회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정의를 넘어서서, 돌이킨 자신의 무한한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 돌이킨 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기숙 목사
예수사랑교회


금-힘의 근원
본문 : 삿 16:15~21
찬송 : 314장

손에 있는 것을 다 놓자! 손가락 사이에 남은 모래 한 톨이라도 다 털어야 한다. 깨끗이 손을 씻은 후, 두 손을 모아야 하나님이 그 손을 채우신다.
 
욕심 없이 한 발 한 발 내딛겠다던 초심이 희미해지고, 어느덧 성큼 성큼 두 세 발씩 올라가려고 하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가난한 영혼, 빈 영혼을 채우신다. 그러나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머리카락이다. 삼손은 너무 쉬이 버렸던 머리카락.
 
삼손의 삼손됨은 그의 이름에 있지 않고, 그의 머리카락에 있었다. 삼손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바로 존재의 의미였다. 나실인으로서의 삼손은 그의 서원이 끝날 때까지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었다. 아들이 없었던 아비 마노아에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삼손을 나실인으로 허락하셨고, 삼손은 그 시작부터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삼손은 그 아비 마노아의 아들임과 동시에 그에게 머리카락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삼손은 그의 머리카락을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삼손에게 힘과 지혜를 주셨다.
 
삼손의 힘과 의지를 무너뜨린 것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요, 힘 있는 용사가 아니었다. 삼손의 머리카락을 베어간 사람은 작고 연약한 여인이었으며, 삼손의 머리카락은 베어지기 전에 이미 없는 것과 같았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삼손의 존재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여러분의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쾌락과 만족을 얻기 위해 팔아버린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들릴라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잘라버린 머리카락은 어디에 있는가?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하였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의 이름이 있었던 교회였다. 초대교회의 존재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었다. 그들은 은과 금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머리카락 잘린 삼손들이 참 많다. 힘의 근원인 머리카락을 너무도 쉬이 팔아버리고, 삼손처럼 눈멀고 힘빠져 세상의 노예가 되어 연자맷돌을 돌리며 살고 있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차라리 목을 베어야 했다. 그가 목을 베일 각오로 살았더라면, 민족과 하나님을 위해 자기의 사명을 감당했더라면, 삼손은 힘의 근원 하나님께 붙들려 끝까지 사용되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아버지 하나님, 진정 붙들어야 할 것을 붙잡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전규 목사
신림교회


토-역전(逆轉)인생의 비결
본문 : 막 10:46~52
찬송 : 337장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사람들의 병과 약함을 고치셨다. 하지만 모든 병자들이 다 고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고난과 한계를 넘어 낫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 본문의 바디메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지만 남들에게 없는 특별함으로 병이 나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역전의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구원에 이르는 바른 지식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 소개했지만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으로, 약속의 그리스도로 알고 믿었다. 성경은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우리의 삶의 약한 부분들을 고치고 은혜로 더욱 풍성하게 한다.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여호와를 알기에 힘써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란다.
 
둘째, 더 큰 용기이다. 앞을 못 보는 소경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부르짖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었지만 그럴수록 예수님을 향해 더 크게 부르짖었다. 주님은 그 간절함에 응답하셔서 그를 부르셨고 바디메오는 유일한 재산인 겉옷까지 내버리고 부르신 곳으로 뛰어나왔다. 아직 그의 눈이 고침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보고, 순종함으로 나아왔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부르심에 순종하기가 부담스럽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언제나 쉬운 응답만 주시는 분은 아니다. 더 큰 용기와 믿음으로 부르심에 순종하기 바란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의 발이 홍수로 범람하는 요단강 물에 잠길 때 40년의 광야생활이 끝나고 약속의 땅으로 향한 길이 열렸다.
 
셋째, 더 좋은 것을 향한 결단이다. 주님은 바디메오의 바른 지식과 간절함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일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동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주님을 따랐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사기 마련이다. 소경이었던 바디메오는 남은 인생의 가치를 예수님에게서 찾았다. 사명에 동참함으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다. 환란과 핍박 가운데에서 부르짖음으로 주님을 만났는가? 순종함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진정한 인생역전은 주님을 만나고 순종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땅 끝까지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과, 음성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주의 뒤를 온전히 따를 수 있는 결단이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홍성철 목사
새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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