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성공기준

[ 기고 ] 함께생각하며

정재훈 목사
2015년 03월 17일(화) 16:52

 
어느 세계이든 성패가 있기 마련이고 누구에게나 공과(功過)가 뒤따른다. 목회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기에 그 성공 기준이 어떤 것인지 외람되게 일언(一言)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각기 다른 분야마다 우열이 있는것 처럼 교역사회 또한 그러하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큰 도시 대형 교회를 무난하게 담임하게 되면 성공하고 있음을 평가하게 된다. 또한 그와 같은 여세를 유지하다가 정년하게 되면 인정을 받게되고 동역자들에게 부러움을 사게 된다.
 
이와같은 현실만을 액면 그대로 사역자의 성공기준으로 볼 것인지 의구심이 생겨난다. 농촌교회 작은 교회만 섬기다가 총회 연금도 없이 사역이 끝난다 해서 성공여부를 논할 수 있겠는지. 주님께서 관여하신 면면을 보면 무량위주가 아니였고 안일과는 거리가 멀다.
 
목회가 평탄치 않았고 한곳에서 장기간 롱런하지 못한 것을 실패로 여기는 열등감에 젖어서는 안된다. 가장 뼈아프고 수치스러울 때가 교인에게 배척받고 교회를 떠날 때이다. 물론 자신의 부족 과 무능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겠으나 당연지사로 여겨야 한다. 순풍에 돛 단듯이 그러한 사역이라면 정상이 아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겪어야했다.(갈4:19) 해산의 수고는 출산의 고통을 말한다. 모세의 경우 동족 구원이란 민중사역의 고난이 오죽했으면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죽여달라(민11:15)"라고 소원했겠는가!
 
목회 전반이 힘들어 지쳤고 역부족으로 밀려난 것을 실패로 여기지 말자. 때로는 저들이 나와 무슨 원한이 쌓였기에 저토록 저럴가 한탄해 볼때도 있다. 온갖 상처로 소문난 시선 때문에 문밖을 나서기 싫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아픔과 수치가 목회 성공의 감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훈장으로 여기는 자부와 긍지가 요구된다. 목장에는 어디든지 예수님때와 같이 유대인, 토착세력, 장로가 있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만 여길것이 아니다. "내가 뭔데"그럴 수 있겠다 받아드리는 아량이 필요하다.
 
유성룡(柳成龍)은 임진왜란 7년 동안 나라를 지킨 1등 공신이다.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그가 있었다 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이순신이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를 맞던날 (1598.11.8) 그는 영의정에서 쫓겨났다. 일본과 강화를 주도해서 나라를 그르치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는 파직되던 다음날 서울을 떠나 삭탈관직 된 신분으로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두문불출하며 세상을 잊기로 했다. 선조(宣祖)가 복권시켜 다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충훈부(忠勳府)에서 화사(畵師)를 보내 초상화를 그리도록 요청했지만 이 또한 거절한다. 나라에 끼친 이렇다할 공훈이 없다는 이유였다. 수영지절(瘦影之節)이라하여 "선비는 짙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는 옛 가르침 그 실체가 된 것이다. 귀향 2년 후인 1600년 12월말 의인왕후(懿仁王后) 국상 때는 동대문 밖 길가에서 곡송(哭送)만 하였을 뿐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로 곧장 돌아왔다.
 
바로 이점을 주의 종들이 배워야하고 가슴에 새겨야 하겠다. 교회를 물러 나온지 6개월이 되지도 않아서 새로 부임한 교회 청년들을 데리고 자랑삼아 전에 있던 교회에 간다던가 전임교회 권사 회갑이라 하여 사모님과 떠나온 교회에 동행하기도 하고 수시로 간다면 이런 행위가 바로 실패요인이다. 은퇴자 역시 그러하다.
 
인생은 후반이 아름다워야 지난날이 빛나게 된다. 목회실적이 미미했다 하여도 허(虛)한데 없이 깔끔하게 마쳤다면 성공이라 하겠다. 화려하던 현역시절에 비해 덕스러운 향기가 묻어나지 않는다면 성공에서 멀어지고 있음이다.
 
노회와 총회 어디서나 좋은 자리는 혼자서 독식할 만큼 대단하였지만 그가 후배들에게 커피한잔 사는 것 못 봤다는 핀잔을 들은바 있다. 은퇴한 그 어른이 저쪽에서 오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젊은이들이 피해버린다니 그지없이 한심스럽다.
 
사모님이 농촌 노인복지센터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근무하시어 그런대로 생활하는 자립대상교회 목사님의 이야기다. 권사님 추도예배를 인도해주었더니 경주에 사는 아들이 감사헌금 말고도 목사님께 사례로 100만원을 드리고 갔다. 아마 이 목사님의 사역중 처음 받아보는 액수였을 것이다. 목사님은 이돈을 자신의 것인데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으셨다. 경북노회 은퇴목사님들을 초청하여 융숭하게 대접하였고 빛나게 쓰셨다. 필자가 속한 경북노회에 이런 목사님이 있어 한없이 자랑스럽다.
 
한경직 목사님의 최후가 후배 목사님들에게 귀감이 되고 교훈을 준다. 또 위로가 된다. 그가 만년을 보낸 주택은 7~80평 되는 고급 아파트가 아니였다. 영락여자신학교 소유의 허름한 18평짜리 단층집이었다. 중요한 것은 현역시절 못지않게 퇴임 이후이다.

정재훈 목사
대구서부중앙교회 원로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