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위기의 학교를 살린 시온교회, "지역사회 속에 우뚝"

[ 교단 ] 폐교 예정이던 낙동초교 살리고 지역사회엔 활력 수혈, 지역축제 통해 교회와 사회의 소통 확대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5년 03월 17일(화) 13:21

 

   
▲ 시온교회는 지역의 학교를 살리는 일이 지역사회를 살리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단초라고 판단했다. 사진은 낙동초등학교 아이들의 밝은 모습. 사진/시온교회 제공

【충남=장창일 차장】충남 보령시에 위치해 있는 충남노회 시온교회(김영진 목사 시무) 주변에는 축산 농가들이 더러 있고 새우젓으로 유명한 광천이 차로 불과 5분에 있다. 이뿐 아니라 서쪽으로 조금만 더 나가면 서해 바다가 펼쳐진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산과 들, 거기에 바다까지 있는 낭만적인 풍경이지만 이런 곳일수록 목회는 레드오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1993년에 이 교회에 부임한 김영진 목사는 인터뷰 내내 "이곳은 블루오션"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시온교회에서의 사역을 돌아보면 이곳이 결국은 블루오션이었습니다. 교회도 건강한 사역을 하고 있고 지역의 학교도 살렸고, 지역축제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규모의 성장이 아니라 지역사회 속에 교회가 녹아들어서 이제는 교회와 지역 간의 구분이 별로 없어졌습니다." 김영진 목사의 말 중에서 '학교를 살렸다'는 부분이 관심을 끌었다.

학교, 정확히 말하면 교회와는 2km 떨어져 있는 낙동초등학교와 시온교회는 각별하다 못해 땔래야 땔 수 없는 운명공동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온교회가 아니었다면 낙동초등학교는 이미 2011년 폐교됐을지도 모른다. 실제 2007년은 낙동초등학교에게는 개교 이래 최대 위기였던 시기였다. 당시 지역 교육청이 폐교 대상 학교로 낙동초등학교를 선정했기 때문. 보통 이와 같은 결정이 있으면 학교는 문을 닫고 몇 명 남지 않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게 수순이다. 하지만 '학교와 교회는 운명 공동체'라고 판단한 시온교회는 본격적으로 학교를 살리기로 결정한다.

우선 학교와 협의해 교회가 진행하던 공부방 프로그램을 학교로 옮겼다. 폐교를 준비하던 낙동초등학교에 첫번째 생기가 공급되는 순간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낙동초등학교에서는 피아노 레슨과 영어, 한문 교육 등 특별활동반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위해 목회자는 물론이고 당회와 교인들 전체가 '내 일처럼' 나섰다. 김영진 목사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학생들의 하교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노란색 교회 봉고차를 끌고 학생들을 실어나른 세월이 이제 곧 10년을 바라본다. '학교를 살려야 교회의 미래도 있고 마을도 활기를 잃지 않는다'는 분명한 목적 아래 학교 살리기에 뛰어든 시온교회는 뜻밖의 지원군을 만난다. 바로 KBS가 시골의 작은학교를 살리기 위해 시작했던 '천상의 수업'이 낙동초등학교를 찾은 것이다. 그것도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함께. 교회와 지역사회, 동창회까지 모두 '학교를 다시 세우겠다'고 의기투합해 고군분투하던 중 나타난 리처드 용재 오닐은 낙동초등학교를 '벌떡' 일으켜 세우기 위한 마지막 숨을 불어 넣었다.

해가 지나도록 길게 이어진 촬영 기간 동안 낙동초등학교에는 합창단이 만들어졌고 음악 열풍이 불었다. 기존에 김영진 목사의 부인 김지영 씨가 하던 피아노 레슨에 이어 재학생 전원이 1학년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는 계기가 됐다. 낙동초등학교 동창회는 리처드 용재 오닐과 아이들이 함께 뒹굴며 음악을 배우는 모습에 감동해 입학생들에게 매년 바이올린을 선물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몇해 동안 이어오고 있다. 합창단도 그대로 남아 운영되고 있다. 2007년 폐교 결정으로 2011년이면 인근 학교와 통합될 운명이었던 낙동초등학교가 우뚝 서게된 결정적인 계기를 바로 시온교회가 제공했고 의미있는 결실을 남긴 것이다.

학교 살리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물었다. "시골에서 학교가 사라지는 건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학교가 사라지는 건 젊은이들의 대이동을 의미하죠. 무엇보다 학교가 했던 마음의 구심점 역할, 이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주민들의 마음이 알게 모르게 흩어지고 마는 것이죠. 물론 학교라는 곳은 문화를 생성합니다. 이 또한 사라지겠죠. 그때 시온교회 교인들이 모두 의기투합해 준 덕에 지금도 전교생 50명의 학교, 그것도 좋은 학교로 남아있습니다."

김영진 목사는 시온교회를 농촌교회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지역교회'라고 여기고 있고 자신을 지역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지역 목회자'라고 소개한다. 무엇보다 농촌교회라고 규정한 뒤 농촌이라는 특성에 집중해 사역의 범위가 축소되는 걸 경계한 것이고 무엇보다 김영진 목사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문화'였기 때문에 지역사회와 함께 문화를 통한 목회를 하기 위해 부임 직후부터 '지역목회'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지역과 호흡하기 위해 시온교회는 9년 전 '들꽃축제'라는 이름의 마을잔치를 시작했다. 지금은 '언제나 변함없이'라는 의미의 '온새미'로 이름을 바꾼 이 축제는 교회가 시작했지만 어느새 지역의 잔치로 자리잡은 경우다. 이 교회 이원갑 장로가 가꾼 수목원에서 매년 진행하는 이 축제는 기본적으로 농촌을 소개하는 게 중요한 콘셉트다. 김치담기 체험부터 치즈 만들기, 떡마당은 물론이고 교인들 각 가정이 정성들여 가꾼 꽃 전시도 한다. 볼거리 많고 먹을거리 많은 흥겨운 잔치로 자리잡은 것이다. 최근엔 기획재정부가 후원하는 '찾아가는 문화 프로그램'이 열리는 축제가 돼 관람객이 더욱 늘어났다.

시온교회의 모토는 '건강한 농업을 이어가는 일, 학교를 살리는 일, 문화적 토양을 돋우는 일'이다. 최근 건강한 농업을 이어가기 위한 일환으로 지역의 7개 교회가 참여한 가운데 농촌교회의 미래를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의 이름은 가칭 '온새미로 들꽃마을'. 이 모임을 통해 농촌이 가진 역량을 농촌 스스로 키울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끝으로 김영진 목사는 "얼마 전 교인이 된 60대 중반의 교인이 '교회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왔을텐데..."라고 말했는데 이보다 더 큰 감동이 없었다"면서, "시온교회가 지역교회로 잘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도운 교인들과 특히 원동화 이원갑 박동규 장로님의 모범적인 신앙의 모습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면서 교인과 주민들과 함께 성장하는 시온교회의 내일을 꿈꿨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