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예흐와'의 은혜로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

장순애 교수
2015년 03월 16일(월) 17:59

요즘은 거의 보기 힘들지만 예전엔 '오늘도 무사히'라고 적힌 작은 그림을 붙인 차가 꽤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것을 어린사무엘이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최근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사무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사무엘상 2장과 3장은 '기도하는 사무엘'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처음으로 직접 부르셨던 때(약 12세 무렵)를 성경은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삼상3:7)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대체 왜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의 말씀과 만난 12살의 사무엘보다 훨씬 더 어린 사무엘을 기도의 아이콘으로 삼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성경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그 아이가 '여호와를 섬기니라'(2:11, 18, 3:1)고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기도하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교회나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특별한 종교적 행동을 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사무엘이 행한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이라고는 '밤에 여호와의 전안에 누웠고'(3:3), '아침에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연'(3:15) 행동뿐이었다. 그것도 학자들에 의하면 12살 무렵에나 했던 일이다.

사무엘이 부모의 서원기도를 갚기 위해 실로의 성소에 들어온 것은 '젖뗀 후'(1:24), 약 5세 미만의 유아ㆍ유치부 아기들 또래였다. 부모가 집으로 돌아간 후 성소에 혼자 남게된 다섯 살이 채 안된 그 아이는 성소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어떤 때는 울기도 했을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밥을 먹다가 흘리기도 했을 것이고, 잠투정을 했을 수도 있다. 물론 성소 마당을 뛰어다니며 깔깔대기도, 성소 안의 어른들이 하는 행동들을 유심히 보다가 흉내 내기도 하면서 남들과 다를바 없는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부모와 떨어져 홀로 성소에 남겨진 다섯 살 미만의 그 아이가 여호와를 '섬기니라'(2:11)고 한다. 해마다 새로 지어 온 작은 겉옷을 입어야 했던 그 어린 사무엘이 자라면서 여호와를 '섬겼더라'(2:18)고 한다. 그리고 어느덧 12살 무렵, 아이 사무엘이 여호와를 '섬길 때'(3:1) 하나님께서 비로소 사무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게 하셨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다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 성경에 특별히 기록될만한 뚜렷한 종교적 행동 하나 없는 사무엘, 12살까지는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 경험적으로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직' 결단적, 책임적 삶을 시작도 못한 사무엘을 성경은 어떻게 '여호와를 섬긴' 사무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비밀은 '임 예흐와'(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번역되었지만,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2:21) 아기 사무엘, '여호와에게' 은총을 더욱 받는(2:26) 아이 사무엘, 그리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3:19) 청소년 사무엘. 그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자라가는 모든 삶을 성경의 기자는 '여호와를 섬기는' 삶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은 자신이 행한 어떤 종교적 행동의 탁월함 때문에 '여호와를 섬기는' 어린이였다기 보다는, '임 예흐와'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섬기는' 유아, 어린이, 청소년이었던 것이다.

장순애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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