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월 2~7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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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25일(수) 11:55

월-은혜로 사는 사람들
본문 : 시 107:4~9
찬송 : 310장

무슨 운동이든지 자세가 중요하다. 자세를 보면 실력을 알 수 있다. 운동할 때 자세, 즉 폼이 좋아야 한다.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폼이 나쁘면 보기에 좋지 않다. 폼이 좋으면 50점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자세, 폼이 중요하다.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보면 은혜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영혼에 대한 목마름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저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을 주셨다. 지금 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광야를 통과하면서 당하는 육체적 시련기에 있는 것이다. 이 시련 속에서 저들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다. 이 광야에서 주시는 시련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들의 고통하는 신음 뒤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다. 그러기에 이 시편의 말씀은 고통의 시가 아니라 감사의 시이다. 문제는 더 이상의 문제가 아니다. 고통은 더 이상의 고통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께 간절히 회개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여정 중에도 여러 가지 근심거리들이 있다.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듯 어려운 문제가 있다. 고민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프고 해결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하지 말자. 미루지 말자. 작은 죄라도 회개하지 않고 모으면 멸망할 죄가 된다. 그러나 큰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한다.
 
셋째, 인생에 기적을 주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시는 기적을 믿고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주린 영혼에 좋은 것으로 채우시기를 원하는가?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란다. 감사하는 사람은 은혜를 가다리는 사람이다.
 
구약의 표현을 따르면 에스겔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원래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자들이다. 즉 신약의 표현으로 다시 우리의 정체성을 본다면 우리는 마귀를 아비로 섬기던 절대적 절망의 삶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입혀 주시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가 되었다. 이 은혜를 망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의존성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다.
 
러시아의 대문호 솔제니친은 "만약 6천만 러시아인의 생명을 삼킨 무서운 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내게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답변을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작은 죄라도 돌이켜 즉시 회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형제 목사
오병이어교회


화-빈 그물을 채우는 방법
본문 : 눅 5:1~11
찬송 : 384장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기에 빈 그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으로 인해 빈 그물을 가득 채우게 된다. 예수님만 만나면 인생이 달라진다. 예수님을 만나면 빈 그물이었던 인생이 가득 채워진다. 내 그물이 비어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로 그물을 채우려면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없이는 빈 그물이다. 사람들은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행복도, 성공도, 축복도 있다. 죽는 순간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빈 그물의 인생을 산다. 우리 인생이 복을 받으려면 먼저 말씀이 내 심령에 들어와야 한다. 주님은 나의 배에 고기가 가득차길 원하신다. 열매가 가득하길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 우리가 빈 그물을 채우려면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 깊은 곳으로 가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열매를 경험하게 된다. 깊은 곳은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잡지 못한 실패의 장소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과거의 실패의 현장이 있다. 내가 힘들었던 장소가 있다. 그곳이 실패의 장소였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실 때 놀라운 열매가 담기게 될 것이다.
 
셋째로 내 생각을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베드로의 배를 강단으로 삼고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명령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당시 어부들에게는 상식이 있었다. 밤에는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고, 낮에는 얕은 곳에서 잡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나? 시간적으로 낮에는 고기가 없다. 장소적으로도 깊은 데는 고기가 없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종으로 나아갔다. 자신의 경험이나 이성적 판단보다 말씀을 선택했다. 어떻게 베드로가 순종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베드로가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배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은 말씀에 붙들려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말씀에 붙들려서 살아가려면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왜 내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씀에 어린아이처럼 순종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오늘의 기도
 
말씀 앞에 내 수단과 방법과 경험을 내려놓고 순종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병원 목사
강남교회


수-화평케 하는 자, 핍박도 받는 자
본문 : 마 5:9~12
찬송 : 427장

팔복 중 일곱 번째 복은 화평케 하는 자에게로 간다.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중재하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이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역대상 22장 8~10절에서 다윗이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다. 다윗은 싸움을 많이 해서 성전을 짓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솔로몬, 즉 평화의 사람이란 의미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정말 평화의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 지은 성전이 진정 평화의 집이었을까? 아니다. 진정한 평화의 사람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으신 성전이 평화의 집이다. 그리고 그 성전은 곧 우리를 말한다. 팔복 설교의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향해서 평화의 중재자가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들, 즉 '에이레노포이오이'가 되라 하신 것이다.
 
팔복 중 마지막 복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향한다. 그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팔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천국을 소유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가 무엇일까? 11절을 보면 이 의가 예수님을 특정적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함은 결국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핍박을 받은 자들은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 핍박은 순교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는 곳을 말하는 것이지 죽음 이후의 세계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삶은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샬롬은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완전한 상태 온전한 정도를 말한다. 성전은 이런 완전과 온전의 심볼이다. 따라서 성전을 짓는다 함은 완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인 것이다. 더구나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인 인격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해지지 않는가? 우리는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샬롬의 상태로, 더욱 더 완전한 상태로 만들어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큰 상을 준비해 놓으셨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 이 상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는 평화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성계 목사
모든이교회


목-이 세상 끝날까지
본문 : 왕상 19:8
찬송 : 425장

날마다 내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 것처럼 속으며 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합왕의 왕후 이세벨의 서슬퍼런 죽음의 위협 앞에서 천사를 통하여 떡과 물을 먹고 엘리야는 힘을 얻어 끝까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 끝날까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첫째, 이 세상 끝날까지 깨어서 기도하며 때를 알아야 한다. 항상 깨어 기도해야만 지금 때가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전쟁과 지진과 기근의 소식이 들려올 때에 주님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 전쟁 기운의 소식이 세계 곳곳에서 우리에게 들려온다.
 
끝까지 늘 기도하며 깨어있을 때, 때와 시기를 알려주신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 그들이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와서 문이 닫히고 만다. 주님 오실 그 때를 알지못하고 준비하지 못해 버림을 받는다. 내 앞에 문이 닫히지 않도록 때를 알고 이 세상 끝날까지 기도해야 한다.
 
둘째, 이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환경을 따라가다가 믿음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학업과 진로 문제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 사업이 너무 번창해서,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나 힘들어서, 그어떤 이유로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안된다. 평생 이 세상 끝날까지 변치않고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할 이유는 예수님을 떠나면 우리에게는 생명도 없고, 가치도 없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 이 세상 끝날까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해야 한다. 엘리사도 엘리야가 이 세상을 떠날 직전에 선생이 가지고 있던 성령의 역사가 갑절이 있기를 사모했다. 엘리야는 "네가 내게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라고 했지만 엘리야에게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엘리사에게 강하게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여건, 환경, 처지,나이의 한계, 그 모든것을 뛰어넘어 우리는 주님오실 그날까지, 이세상 끝날까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엘리사도 엘리야가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선생이 가지고 있던 성령의 역사가 갑절이 있기를 사모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무엇을 간절히 구하며 무엇을 사모하며 살았는가? 엘리야는 승천하기 전까지 평생을 끝까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다. 우리의 환경이 사명을 감당 못하게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주님 오실 그날까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자.

오늘의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젊어서도, 부유할 때도, 환경이 좋은 때도 아닌 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 안에 거하며 사명 감당케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순희 목사
세종반석교회


금-괴로워도 기다리라
본문 : 시 40:1~4
찬송 : 543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당시에는 도저히 이겨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지나놓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을 알게 된다. 힘들어도 조금 기다리면 지나간다.
 
본문 1절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했다. 히브리어는 중요한 말씀일 경우 본문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고 표현했듯이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그 뜻을 강조한다. 성도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기도하면서 계속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청지기로서 주어진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다가 환난이나 시험을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기도하며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자가 복이 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
 
누구든지 어려운 일은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지고 시간도 길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을 어느 정도 끈기 있게 참아내는지 지켜보고 계신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위대한 선진들은 오래 참음으로 열매를 거두었다. 다윗도 오랜 고난을 잘 참아냄으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끝까지 참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울을 심판하실 때까지 기다렸다. 다윗이 끝까지 참지 못했으면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참는가를 보신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해도 드러내지 않고 오래 참고 기도하면서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본문 2절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사 환난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쉽사리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참을성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므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을 살펴 보면 너나 할것 없이 너무나 조급해 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를 향하여 그렇게 빨리 가고 있느냐?"하는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괴로워도 느긋이 기다리자. 하나님의 힘이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의심의 안개 속에 있을지라도 기다리자. 하나님께서 안개를 걷어낼 바람을 준비하고 계신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기다리자 하나님께서 대신 해결하여 주신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수렁에서 올리시고 나의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두가 조급해 하는 이때 느긋이 인내하며 기다리는 여유를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은수 목사
열린교회


토-'전에'와 '이제'
본문 : 골 3:7~8
찬송 : 459장

우리가 성경을 상고해 보면 '전에'와 '이제'를 구별하는 말씀이 여기 저기 많은 것을 볼 수 있다(엡 2:19, 엡 5:8, 롬 6:22, 갈 4:9). 이것을 변화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전에와 이제의 구별된 삶을 세 가지로 살펴보자.
 
생각의 변화
 
변화는 생각에서부터 와야 된다. 생각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의 행동은 거짓이요 위선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왜 강자이겠는가? 요셉은 생각이 썩지 않았다.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간다 해도 그 환경의 어두움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요셉의 믿음이 위대했던 이유가 환경에 관게없이 그 생각을 제어했기 때문이다. 밤낮 불행하고 우울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이 그런 것이다. 우리는 생각을 잘 지켜야 한다. 믿음의 정의를 21세기 용어로 설명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건전하고 그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좋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다. 성도는 그래서 마음부터 '전에'와 '이제'로 구별되어야 한다.
 
언어의 변화
 
마음이 변한 사람은 언어의 변화도 오게 마련이다. 성경에는 특별히 언어에 대하여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이 많이 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부터는 말부터 달라져야 한다. 본문 8절에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전에는 이런 말을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전에는 부정적인 말을 했으면 이제는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야 한다. 전에는 남의 단점을 보고 말을 했으면 이제는 남의 장점을 보고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한다. 전에는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으면 이제는 남을 위로하고 용서하는 말을 해야 한다.
 
행동의 변화
 
이제는 행동의 변화가 와야 한다. 초대교회를 보면 성령이 충만하니 행동의 변화가 온다.기도에 전혀 힘쓰는 생활이 오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여 순종하는 삶이 찾아왔다. 그리고 유무상통의 생활을 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 보신다. 우리의 생활에 전에와 이제가 구별되는 변화가 와서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을 닮아 구별된 삶으로 증인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종훈 목사
금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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