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모토유키 목사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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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10일(화) 15:07

노무라 목사는 1931년 교토 직조공장 사장 손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동지사대학 행정학 교수였다. 그는 목사이자 사회운동가였던 가가와 도요히코(1880~1960)의 영향을 받고 활동했던 사회선교의 선구자였다. 그의 어머니 노무라 가스코는 소비자운동가였으며, 1993년에는 가나안농군학교로부터 일가상을 수상하였고, 2005년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크리스천 사회정의운동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배웠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노무라 목사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성장했다. 그의 외가는 빈민가에 있었다. 그곳에서 가난한 일본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그리고 조선인 친구들이 얼마나 차별받는지를 보았다.

노무라 목사는 1957년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그때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안수해주던 목사에게서 들었다. 이후 마음껏 사람을 섬기기 위해 특정 교단이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목회를 했다. 그는 1961년 귀국 후 도쿄에서 하치만야마(八幡山)교회를 시무하기 시작했다.

1968년 미국 유학 시절 노무라 목사가 도움을 준 적 있었던 김세복, 당시 서울 그리스도대학 동문회장의 초청을 받았다. 이 학교 관계자들은 우리나라 가난한 심령을 위해 일본 기독교계가 나서 줄 것을 요청했고 이후 일본 목회자들과 '한국교회를 생각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그리고 4∼5년간 한국을 드나들며 소명을 실천할 대상지를 찾았다. (전정희 기자,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목사', 국민일보 2009.12.24)

1973년 노무라 목사는 청계천에서 영양실조와 병마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는 '한국의 가난이 일본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생각했고,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6.25도 청계천 빈민도 없었다'고 믿었다.('만물상', 조선일보 2013. 10. 29) 노무라 목사는 가족들에게도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여 주었다. 1973년 첫 해외 가족여행으로 한국에 왔고, 제주도, 부산, 경주, 동인천, 서울, 춘천, 화성 제암리 등지를 다녔다. 특히 제암리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학살을 먼 과거의 일이 아닌, 노무라 목사 자신의 일로 인식되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노무라 목사는 '나는 뭘 할 수 있지?' 그 자신에게 반문했다. ('서울시 명예시민 된 日 할아버지의 편지', 국민일보 2013. 11. 6) 노무라 목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청계천을 돕기로 결정했다.(김종규 장로 면담, 2014. 5. 12) 그가 간 곳은 청계천 하류 개미마을이었다. 청계천 빈민촌에서도 가장 비참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람을 건져서 장례 지내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고, 구더기가 살을 파먹고 있어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는 소녀를 보기도 했다. 노무라 목사는 그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소녀는 눈만 굴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예수님이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만물상', 조선일보 2013. 10. 29) 움막에 사는 세 아이의 엄마인 한 과부의 집에 갔다가 쌀을 구해 와서 오염된 청계천물로 지은 밥과 청어를 넣어 끓인 국을 대접받기도 했다. 밥은 설익었고, 냄새도 역했지만 "목사님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세요"라는 그 과부의 말과 그를 지켜보며 떨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먹어야 아이들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도회 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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