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큼 사는데 누가 뭐래…?

[ 논설위원 칼럼 ] 논설위원칼럼

홍성호 목사
2015년 02월 09일(월) 20:04

2015년이다. 긴장되는 한 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딱 10년 전, 2005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861만 6천… 14만 4천 감소… -1.6% 성장"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마치 시험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처럼 1995년 이후 10년 동안의 결과물이 손에 쥐어졌을 때, 이 땅을 살아가는 크리스찬들과 교회들에게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하면 과장이기만 할까? (물론 이런 통계들이 전수조사라서 우리가 지닌 관점과는 다를 수 있지만, 정작 이런 통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선교적 차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2015년 11월 말이면, 지난 10년 동안의 결과물이 또 다시 쥐어질 텐데 이번에는 어떨까? '정체만 되도 선방(善防)'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도는 걸 보면 그 전망은  결코  밝지만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이 땅의 크리스찬들과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사장 김지철)과 크로스미디어랩(원장 옥성삼)이 지난해 한국기독교언론포럼 정기뉴스레터의 기사를 분석한 결과, 일반 언론이 가장 관심을 갖는 기독교 뉴스 주제는 '교회와 사회의 소통 문제'였다는 보도만으로도 이것은 진행 중이라 여겨진다.

그 때 수많은 분석 기사들을 접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중, 가톨릭의 비약적인 성장(514만 6천… 295만 1천 증가…! 74.4% 성장)을 분석하면서, '그들은 왜 가톨릭교회로 갔을까?(정재영 조성돈 엮음, 2007년, 목회 사회학연구소)'를 질문했던 적이 있다. 그 자료들을 접하면서 스스로에게 요약된 결론은 "(개신)교회는 시끄럽다…!" 그리고 "성(聖)스러움, 곧 거룩의 상실"이었다. 이 둘은 상호 연관된 분석이겠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곳에서 사람의 소리들이 더 커지기 시작하니까 당연히 (개신)교회에 '성(聖)스러움, 곧 거룩'이 설 자리가 없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러니 종교 감정을 '성(聖)스러움의 경험'으로 분석해 낸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선 인간의 심리적 경험을 '압도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이자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fascinans)'라는 정반대의 감정 요소라 했는데, 소위 그러한 '경외감(敬畏感)'이 (개신) 교회에서 경험되고 있는가 그 말이다. 오토에 의하면 진정으로 그 '신비로운' 대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는데, 혹 인간적인 제도와 형식, 또는 먼저 믿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하나님을 교회에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 2015년의 시작이다. 아니, 오히려 2015년 그 이후를 새롭게 할 결정적인 2015년이 시작되었다.
지나간 과거가 먹구름으로 가득하다면, 그 먹구름을 걷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 먹구름 너머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될 때, 그로부터 삶은 확실한 의미를 가지게 되며, 당연히 그 이후로는, 라인홀드 니이버의 말대로 '책임적 자아(The Responsible Self)'로 살아가게 된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살만큼 사는데 누가 뭐래…?'가 아니라.

사실 사람은 그 태어난 바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성(聖)스러움, 곧 거룩'을 살아내는 것일 진데, 놀랍게도 그 '성(聖)스러움, 곧 거룩'은 '접촉'이라는 방식을 통해 살아내진다. 이는 거룩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접촉을 통해 그 누군가에게 거룩이 전이된다.

그러므로 본질의 회복, 곧 복음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회개 했으면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나면 그 감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믿음은 "살아내는 것"이라고.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홍성호 목사 / 순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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